"오늘 뭐 해 먹지?"
"오늘 뭘 입지?"
아주 소소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고민이다.
패션의 기본은 블랙슈트 정장이다. 심플하고 단정한 이미지로 누구에게나 무난하고, 어디서나 호불호가 적어서다. 우리도 고르고 고른 끝에 입고 나서는 게 결국 블랙인 경우와 마찬가지다.
패션계에서는 블랙을 모든 색을 지나 마지막에 선택되는 완성에 가까운 색으로 본다.
또한 미니멀리즘이 스타일링의 출발선이라는 오랜 인식 역시 그 선호를 뒷받침한다.
블랙과 미니멀리즘이 세련된 조합이라는 말은 사실 단순하면 할수록 실패의 확률이 적어서가 아닐까.
반면 알록달록 화려한 의상은 촌스럽다는 편견 아래 일상에서 거의 금기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가끔 지나다 보면 과한 색깔의 옷을 매치해서 화려함과 자신감이 넘치는 스타일링을 하는 의외의 연령층들이 있다.
보는 이들의 기분까지 유쾌하게 만드는 옷을 당당하게 입고 다니시는 노인들이다.
그들을 만나면 젊은이들 보다도 오히려 강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사실 그 연세에 좋은 일보다 궂은 경험이 더 많이 쌓여 있으실 텐데 어찌 저리 생각도 의상도 저리도 밝으실까! 놀랍고 부럽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100년 가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곁을 스쳐가고 , 온갖 사물을 보며 세상이 보내는 색에 반응하고 살아왔을까?
젊은 사람은 알기 힘든 것들을 세월로 저절로 얻고서 마음 속에 쌓인 것들을 입고 있는 옷으로 표현해 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 아닐까 싶다.
"아이리스 라펠!"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광고나 잡지에서 한 번쯤 커다란 뿔테 안경에 빨강·초록 원색의 의상, 목과 팔에는 특대형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감고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백발의 할머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많을수록 좋고 적은 것은 지루하다(more is more & less is a bore).’
이 할머니의 패션 테마다.
102세 패션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은 블랙 색상을 기본으로 삼고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패션의 흐름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독창성의 교과서 같은 존재다.
아이리스 아펠은 1921년 미국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인 아버지는 유리와 거울 사업을 했고, 러시아 출신 어머니는 고급 옷 가게를 운영했다.
패션을 가까이하며 미적 감각을 키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었다.
뉴욕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그녀는 1948년 칼 아펠과 결혼 후 ‘올드 월드 위버스(Old World Weavers)’라는 섬유 회사를 운영하며 디자인에 눈을 떴다.
올드 월드 위버스는 중세 유럽 스타일에서 영감 받은 화려한 색감과 문양의 원단을 생산해 큰 성공을 거뒀고, 이를 기반으로 부부는 인테리어 분야에도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트루먼, 케네디, 아이젠하워, 존슨, 닉슨, 카터, 포드, 레이건, 클린턴 등 대통령 9인의 백악관 인테리어를 맡아 ‘패브릭의 영부인(First Lady of Fabric)’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녀가 구사하는 맥시멀리즘은 다양한 소재와 색상, 패턴, 질감, 커팅이 재치 있게 섞였으면서도 복잡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데, 이는 원단과 디자인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덕분이다.
칼과 아이리스 아펠은 2015년 남편 칼이 101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67년 동안 해로한 의좋은 부부였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이들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여행 중 유럽의 벼룩시장에서 사들인 유행이 한참 지난 럭셔리 브랜드의 오트쿠튀르 의상, 에스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액세서리 등은 그녀의 스타일을 더 독특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됐다.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오늘 뭐 입지?’를 고민해 온 덕분에 그녀는 80세 이후부터 패션 셀럽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2005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코스튬 인스티튜트는 아이리스 아펠의 패션 소장품을 선보이는 전시 ‘Rara Avis: Selections from the Iris Apfel Collection’을 열었다.
생존 인물의 패션 소장품을 선보이는 전시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역사상 처음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2018년에는 아이리스 아펠의 모습을 본뜬 바비 인형도 출시됐다.
올빼미 안경과 구찌 슈트, 볼드한 목걸이와 뱅글을 한 그녀 인형은 8등신 바비 인형들 틈에서 독보적인 아우라를 풍긴다.
2019년 91세의 나이에 모델 에이전시 IMG와 계약하고 그래니 시크(할머니 패션)의 아이콘 소리를 들었다.
2020년에는 각자의 옷장 속에 있는 화려한 패션 아이템들을 믹스 매치해 SNS에 올리는 ‘iris your closet challenge’라는 이벤트를 열어 2만 명 이상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영국의 뷰티 브랜드 시아떼런던과 협업해 립스틱, 아이섀도, 네일, 손거울, 파우치백 등으로 구성된 메이크업 키트를 내놓기도 했다.
아이리스 아펠이 스타일링에 있어서 강조하는 것은 독창성이다. 트렌드를 좇지 말고, 남과 같아 보이려 하지 말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녀의 맥시멀리즘이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겠으나 아펠은
“나는 남을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즐겁기 위해 옷을 입는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게 진실하다면 그게 답”
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패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패션계의 이단아이며 여전사였다.
아이리스 아펠은 죽을 때까지 은퇴 없이 왕성하게 활동하다 대중들의 곁을 떠났다.
ㅂ "아이리스 아펠"을 보며 우리는 옷장을 열 때마다 입을 게 없다고 한탄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나이 먹고 살도 찌고, 볼품 없어지니 입을 옷도 없다고 한탄하기보다 아이리스 아펠처럼 내게 맞는 , 내가 좋아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당당하게 개척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언제나 지금부터 시작해 보는거지!
늦은 시도란 없는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