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
올겨울 눈이 많이 내렸어요.
혹한의 추위도 몰아쳤고요.
우리는
제대로 겨울을 겪고 있습니다.
겨울을 사랑하는 저는
눈의 주인공처럼
겨울영화를 보았습니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 같은 이 영화를
오늘 두 번째 보아도 여전했어요.
내 호흡의 텀이 길어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보는내내 특별한 사건도
감각적인 장면도
수많은 눈꽃송이 같은 대사가 없어도 시작부터 끝까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네요.
퀴어영화라지만 그저 두 친구의 오래된 우정과 추억을 되새기며 오늘을 기억하고 내일을 꿈꾸게 합니다.
폭신하고 달콤하고 구름 같은 정서를 담은 영화라서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어요.
섬세하고 연하고 순한 카스텔라 질감입니다.
영화의 계절은 눈 내리는 북해도 오타루의 겨울로 시작해요. 마지막 장면도 봄이 시작되는 겨울의 끝이에요.
윤희의 딸 이름이 그래서 새봄인가 봅니다.
영화는 겨울에서 시작해서 겨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헤매다가 겨울 안에서 해후가 이뤄지고 추억의 완성으로
모두의 인생은 새봄을 맞이해요.
겨울에 떠나는 여행 이야기.
겨울이란 계절이 제대로 느껴지는 영화네요.
맑고 투명한 공기, 세상을 흰빛으로 물들여 추위로 묻어버리는 겨울의 횡포함, 차갑게 몰아치는 단호한 압박, 세상 무엇에 저항할 수 없는 온도의 감옥.
어쩌면 오타루의 겨울은
마치 추억을 꽁꽁 묶어 봉인해 버린 과거라는 감옥을 상징하는듯
끝없이 눈이 내리고 쌓이고
또다시 하염없이 내립니다.
그리움도 꽁꽁 얼어 있었던 둘의 지나간 시간과 오랜 그리움이 눈 속에 갇혀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두 사람을 품고 있는 세상은 온통
흰빛으로 채색되어 있었어요.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완벽한 색상이라고 그리 믿고 또 믿었을겁니다.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감춰진 사연과
풀어가는 이야기 속의 아픔이 반짝이는 모래알같네요.
각자의 비중과 섬세한 연기가 하나도
놓칠 수 없게 시선을 사로잡게 만드네요.
누가 주연이고 조연이다 구분이 안 갈 정도예요. 다투고 싶지도 않을 만큼
각각의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주네요.
쥰의 고양이까지......
자기 몫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어 전개하는 방식이 맡은 배역에 몰두하며
튀지 않고 전체와의 조화로움을
깨뜨리지 않더군요.
감독의 카메라 앵글을 담는 장면이
대단한 스킬이 아님에도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네요.
자칫 밋밋할 눈 풍경에 서있는
인물의 모습과 그 옆에 하나의 가로등,
눈 쌓인 집 앞의 모습, 끎임없이 내리는 눈을 보며 눈을 치우는 광경이 무심한듯
시간에 따른 조도에 따라 눈의 색감이 얼마나 관객의 마음을 멜랑꼴리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두 주인공의 해후를 그릴 때 감독이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고뇌의 흔적이 느껴졌어요.
겨울의 오후 6시예요.
쥰과 윤희의 약속은 아니예요.
겉돌기만한 둘의 마음을 새봄이 이어주었죠.
6시도 새봄과 쥰이 정했고 새봄 대신 윤희가 나갈거란 것도 비밀이었죠.
해가 완전히 지기 바로 직전에 만남이예요.
세상을 덮은 까만 밤이 아니기에
하루를 다 묻어버린 밤으로 잠긴 시간이 아니기에.
곁에 두고 걷는
눈속에 내딛는 발자욱이 콕콕
마음에 박혀 들어오는 시간.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하기에도 서로를 기억의 숲으로 이끌어
하염없이 바라보기에도
그저 그렇게 넉넉할 시간,
아쉽고 조급하지도 않을 시간이
해질녘 노을진 6시인지 모릅니다.
처음에 윤희는 아침에 쥰의 집을 찾아 가요. 그녀의 집 앞에서 갑자기 나오는 그녀를 피해 골목에 몸을 숨어 버려요.
너무 그리워서 어서 아침이 되어 한달음에 달려가 보고 싶었는데 빛이 청명한 아침은 부담이었을까요?
내 모든 게 드러나는 햇빛 아래 서로를
마주 하기엔 부담스러웠을까요.
결국 둘은 만나지 못합니다.
깊고 어두운 밤의 만남은 어떨까요?
지치고 힘들게 끌고 온 수형의 삶이 온전히 얼굴에 드리운채 20년을 가둔 삶과 지금의 힘든 나를 드러낸 아니 지금을 전부 드러내 보여주고 싶은데 거짓말 같은 어둠의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감추는 밤은 소중한 이와 마주하기엔 적당하지 않은 시간일 겁니다.
어찌 소중한 사람을 어둠 속 달빛이나 별빛으로 마주하겠냐고요.
카메라라는 소품의 존재감은 탁월합니다.
카메라를 갖게 된 사연이 슬프죠. 여자라서 대학에 합격하고도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윤희에게 엄마는 불쌍하다고 카메라를 사줘요.
이 사진기로 소중한 쥰을 남기게 되고
윤희의 고운 모습도 딸이 담게 됩니다.
나중에 사진기는 새봄에게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만 담는 눈이 되어요. 어찌보면 새봄의 삶을 전환시킨 매개체이자 새봄에게 다른 세상을 보게해준 존재입니다.
엄마의 오래된 사진기는
새봄의 분신이 되어요.
새봄이 말하죠. 엄마 아빠가 이혼했을때
왜 엄마를 택했는지요.
엄마가 외로워할까봐서라구요.
그런데 엄마와 둘이 살면서 아빠처럼 새봄도 엄마가 곁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됩니다.
윤희와 새봄, 쥰 , 준의 고모가 머무는 공간도 그들의 삶과 생각을 참 많이 닮아 있어요.
달리는 기차, 차를 마시는 카페라는 공간, 고양이와 함께 하는 낮은 책상이 놓인 쥰의 방 안도 그들을 말합니다.
많은 대사도 진부한 설명의 내레이션이 없어도 충분하고 알맞아요.
이십여 년 전 여고시절부터 이어진으로 윤희와 쥰의 인연과 허락할 수 없는 사랑,
긴 이별은 세월 속에서 방황과 좌절을 하는 망망대해를 유영하는 외로운 고래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20년 후 어느 날 쥰의 편지를 발견한 고모가 윤희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새봄이 그 편지를 먼저 보고 일본으로 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아예 시작도 못했을 겁니다. 당연히 끝도없이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시체처럼 무기력한 장면들로 엔딩을 마쳤을 겁니다.
결국 편지가 도착해서 둘이 다시 이어지고 멈춰버린 시계같던 과거는
회색빛으로 죽어 있던 윤희의 현재에
빛을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쥰 또한 아버지의 별세로 가부장적인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새봄도 남자친구 경수의 마음을 받아들여 첫 뽀뽀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쥰의 고모도 마음 속 숨겨온 짝사랑과 이별이 어찌할 수 없음이 아닌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고모를 배려하지 않고
영화관 데이트를 고집하던 그의 이기심때문이었음을 털어놓고 아쉬움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겨울 여행은 오래된 상처에 훈장을 선물하고 서랍속에 고이 간직하기로 합니다. 알고보니 지나간 상처가 남은 삶에 길을 안내해 주네요.
때론 추억도 살아가는
힘이 되나 봅니다.
그렇게 윤희가 달라짐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항상 눈물이 차올라도 눈 안에 그렁그렁 맺히며 참고 삭히던 윤희가 쥰을 보자마자 주르르 흘리는 장면이었어요.
또 한 장면은 전남편이 재혼 청첩장을 내밀며 윤희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 때 윤희는 밀쳐내기만 했던
손을 뻗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축복해 줍니다.
윤희는 남편의 재혼소식을 듣고 홀가분해 합니다.
오빠에게 이사 소식을 알리며 더이상 원망하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이제서야 스스로 일어서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는 걸 깨닫습니다.
이력서에 고졸이라고 씩씩하게
눌러 쓰고 새로운 인생에 문을 두드립니다.
끝부분은 윤희의 답장입니다. 자신의 숨겨왔던 감정과 오랜 상처와 아픔을 풀어나가는 설명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쥰에게 보내는 답장처럼 들립니다.
삶에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고
용기 내어 헤쳐 나가겠다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나는 내 딸이 더이상 배울 게 없다고 할때까지 가르치려 해!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