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인근 소도시 1편
여행을 떠나기 전, 나가사키에 대해 아는 것은 단편적이었다. 원폭이 떨어진 도시. 일본의 서양 창구였던 도시. 짬뽕의 고향. 그러나 이런 지식들은 도시의 표면만 긁는 것이었다. 나가사키는 겹겹이 쌓인 시간의 지층과 같았다. 한 층을 파내면 그 아래 또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날은 흐렸다. 안개가 항구를 감싸고 있었고, 호텔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은 희미했다. 항구도시 특유의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나가사키의 빗소리는 꽤 다르다. 산과 바다가 만나는 지형 때문일까. 소리가 울림통을 만난 듯 반향하는 느낌이다. 호텔 창가에 앉아 빗방울이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여행의 시작부터 비를 만나는 것은 운명 같다. 어쩌면 나가사키를 이해하기 위한 전주곡인지도 모른다.
이 도시는 슬픔을 품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지 않는다. 일본의 다른 도시들처럼 정돈되고 차분한 모습이다. 어쩌면 잊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걷다 보면 문득 느껴진다. 건물과 건물 사이, 길모퉁이를 돌 때, 언덕을 오를 때. 무언가 말하려 하지만 참고 있는 듯한 침묵. 내가 상경하고 종로에서 느꼈던 억압. 느껴지기보다 상상한다. 나는 상당한 F니까. 골목에 찍혀 있을 수억 개의 발자국을 상상하는 일이다.
나가사키의 하늘은 낮고 가깝다. 산들이 도시를 감싸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마치 누군가의 품에 안긴 것 같은 안정감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폐쇄감을 준다. 이 모순된 감각이 나가사키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가사키 같은 도시에서는.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와 함께 공존한다. 시내를 걸으며 서양식 건물과 일본 전통 가옥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시간의 다른 층위가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가사키는 기다림의 도시인지도 모른다. 수백 년간 외부 세계를 향한 창구였으니까. 누군가를, 무언가를 항상 기다려온 도시.
오래된 서양식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벽돌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 그것이 나가사키라는 도시의 본질이다. 문화의 충돌이 아닌 융합.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와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나가사키 짬뽕이 그렇듯이. 서로 다른 재료들이 만나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이 도시의 매력이자 역사다.
저녁 무렵 언덕 위에 올랐다.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 지점에서 나가사키를 내려다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마치 별들이 지상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 불빛들이 의미하는 삶의 무게를 생각했다. 한 점 불빛 하나에 몇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어떤 풍경은 눈으로만 담아야 한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지만, 감정은 담지 못한다. 나가사키에서 느낀 복잡한 감정들. 슬픔과 희망,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뒤섞인 이 감각은 어떤 렌즈로도 담을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오래된 교회를 발견했다. 가만히 앉아보았다. 침묵의 공간이 주는 위안이 있다.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위로를 찾았을 것이다. 삶은 결국 상처와 치유의 반복이 아닐까. 나가사키라는 도시도 마찬가지다. 깊은 상처를, 오랜 시간을 들여 치유해가는 과정.
밤이 깊어갔다. 호텔 창가에 다시 앉았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보였다. 어쩌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가사키의 밤은 깊고 조용했다. 그 침묵 속에서 무수한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