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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gineer Jun 26. 2022

감자, 한국전쟁

며칠전 동네 술가게에서(LCBO:온태리로주는 약 100년전 부터 술판매를 주정부가 독점으로 하고 있는데 무분별한 술 소비로 생기는 알콜 중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우연찮게 구한 백세주 몇 병을 들고 아버지를 뵈러 갔다. 한국 술은 주로 토론토 코리아 타운 근처에서만 볼수 있었는데 마침 변두리인 우리동네 술가게에도 들어온 것이었다. 


백세주를 서너 잔 드신 아버지가 옛날 생각이 나시는지 해묵은 625전쟁 얘기를 꺼내 노셨다. 휴전이 된지 64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6월 25일이 다가오면 그 오래전의 기억들이 되살아나시는 것 같았다. 구순을 넘기신 아버지는 해방 후 경찰에 입문하셨는데 경찰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되기도 전에 625전쟁이 터졌다. 전투 병력이 턱없이 모자랐고 무기도 변변치 못한 상황이라 경찰 병력도 전투 경찰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투입되었다. 

잠시 1945 해방 후 당시 한국의 경찰/군대 역사 공부 : 아래 내용은 미국 국방부에서 발행한 한국 군대 역사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에서 발췌 한 것임. 캐나다 보훈처와 한국전쟁에 참가한 한국 군인의 보상 문제를 논의하는 일을 하면서 알게된 역사 문서들 중에 하나.


1946년 맥아더 장군은 미국정부의 지시 하에 한국 경찰 조직을 최초로 창설하고 1년 만에 약 2만여 명을 경찰을 배출하여 1948년도에는 내무부에 속한 정식 경찰청이 출범했다. 군대보다 경찰이 먼저 창설된 이유는 맥아더 장군이 해방 후 극심한 혼란기를 격고 있는 당시 한국의 치안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미국정부에 경찰 창설을 위한 지원 요청에서 유래되었다. 1948년에 국방부가 창설되고 미국 정부가 472명의 미군고문단을 파견하여 1949년에 65000명의 한국 정식 육군이 탄생한 것의 시작으로 1950년 625 직전에 94808명의 육군, 6145명의 해양경찰, 1845명의 공군과 48273명의 경찰 조직이 생겼다. 하지만 머릿수만 채웠을 뿐이지 장비는 열악했고 체계적인 훈련도 부족하여 1950년 6월25일 새벽 소련제 탱크와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 75000명의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오자 남한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최남단까지 후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그해 9월, 15개국이 합세한 유엔군이 투입되고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함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국군은 중국을 코앞에 둔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위협을 느낀 중국은 수십만 중공군을 투입시켰고 유엔의 지원으로 북진을 거듭하며 눈앞에 승리를 두었던 전세는 다시 뒤바꾸어졌다. 국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고 소대를 이끌던 아버지는 후퇴하면서도 필사적으로 게릴라전을 시도했다. 북쪽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고 끈임 없이 쏟아지는 눈보라 때문에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때가 많았다. 끝내는 주부대와 고립되어 소대원 몇 명을 이끌고 며칠을 굶어가며 산속을 헤메게 되었다. 


동이 틀 무렵 멀리 인가가 보이고 연기가 굴뚝에서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어느 한 농가에 숨어들어 쥔 할머니의 도움으로 감자 몇 개로 허기를 채우고 있었는데 밖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중공군이라며 며칠 전에도 국군을 잡는다며 마을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고 했다. 독에 갇힌 생쥐가 되어 도망 갈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할머니는 아직 재가 남아 있는 아궁이를 이리저리 헤치더니 그 안으로 얼른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급한 김에 여러 생각할 틈새도 없이 아궁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불기가 꺼진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아궁이 안은 뜨거웠다. 그렇다고 다시 밖으로 나올 수도 없어 그냥 꾹 참고 숨을 죽였다. 뜨거운 공기 때문에 숨도 크게 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부엌 안으로 들어왔다. 중공군의 쏼라 소리와 할머니의 목소리가 한바탕 시끄럽더니 다시 우당탕 소리와 함께 조용해졌다. 뜨거운 열기에 정신이 몽롱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는데 아궁이를 헤집는 소리와 함께 얼른 나오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엉금엉금 기어 나와 부엌 바닥에 축 늘어지자 할머니는 찬물로 아버지의 얼굴과 여기저기 덴 자국을 닥아 주셨다. 다행이 크게 데인데는 없었다. 할머니는 빈 소쿠리를 가르키며 중공군눔들이 감자를 다 가져가서 더 줄게 없다며 안쓰러워 하셨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거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구해주셔서 고맙다고, 통일이 되면 꼭 찾아오겠다고….. 그러나 휴전이 되고 이북 땅이 되어 버린 그 곳은 더 이상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언제부터인가 겨울이 되어 차디찬 북풍이 몰아치는 유난히 추운 날이면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감자를 삶아 달라 하셨다. 그리고는 커다란 소쿠리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감자를 담아 빙 둘러 앉은 우리들에게 감자 하나씩을 나누어 주셨다. 


“ 얘들아 아버지가 먹어 본 음식 중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바로 이 삶은 감자란다.”


2017 June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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