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971 이별의 김포 공항

절망과 비웃음

by Engineer

비행기 출발 시간 몇 시간 전에 김포 공항에 도착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엔 현재처럼 해외여행이 그다지 쉽거나 자유롭지 않은 시대였으므로 지금처럼 두어 시간 전에 도착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공항 로비에 들어서자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 동네에서 초등부터 고교까지 모두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기 며칠 전 동네 주점에서 함께 술 마시고 온 동네를

쏘다니면서 작별을 고했기에 공항까지 배웅 나오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다시 만날지

모르는 멀고도 기약 없는 이민 길였으니 마음 한편에 서운한 감정을 떨치지 못했었는데 그들을 보자 반가움과 아쉬움이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다시 한번 나는 그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캐나다 가서 편지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출국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출국장 입구는 한산했다. 여권과 비행기표를 입구에 서 있는 제복 입은 관리인에게 내밀었다.

좋은 데 가시는군요.

캐나다가 좋은 덴가요?

아 그럼요. 참 좋은 나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난 아주 오랫동안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2년 전 강원도 영월에서 탄광을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해외로 출장을 가셨다가 돌아오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 돌아오시는 이유를 아시는 것 같았는데 우리에겐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 그리고 2년 후인 1971년에 나를 제외한 식구 모두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군대 갈 나이가 가까웠던 나는 병무청에서

출국 허가가 비행기 스케줄에 맞추어 나오지 않아 함께 갈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 법은 온 식구가 이민을

가게 되면 군대에 있는 자식도 출소하여 함께 갈 수 있다고 지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세상은 법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군사 독재 시대였던 때라 병무청은 정부 어느 부서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출국 허가는 뒷돈이 드는 일이라 했다.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그저 허가가 나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줄 만

알고 당구장이나 드나들고 친구들과 만나 노닥거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허송세월 하던 어느 날 이민 수속을 했던 회사의 전화를 받고 나의 상황이 아주 긴박함을 깨달았다.

내 캐나다 비자 만료 기한이 2주밖에 안 남았던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여권을 뒤져 보았다.

Visa expiry May 1, 1971 이란 문구가 명시되어 있었다.


발등에 불까지 떨어진 낙동강 오리알 신세에 20살도 채 안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 종일 아는 어른이나 친구들한테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전화를 걸다가 마침 아버지가

군인이신 친구와 통화가 되었다. 그 친구에게 긴급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자신이 아버지한테 여쭤 본 후

연락을 주겠다며 통화를 다시 하기로 했다. 며칠 후 다시 통화가 된 그 친구 예기로는 아버지가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더니 혀를 끌끌 차시며 얘야 친구한테 돈이 좀 드는 일이라고 알려줘라 하셨다 했다. 정확하게

얼마인지는 아버지는 모르시는지 그냥 한 4,50만 원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그리 나한테 일러주라고 하셨다

했다.


온 가족이 떠난 후라 집은 텅 비었고 내 수중엔 그만큼의 현금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 못 차리고 수중의

돈을 거의 다 써버린 결과였다. 집안을 둘러보았지만 가족이 떠나면서 쓸만한 가구들은 이주 관련 업소를

통해 캐나다로 부친 후라 돈이 될만한 물건들이 눈에 띄질 않았다. 적산 가옥이었던 우리 집은 여러 번

증축을 하면서 방이 5개로 늘어났는데 가장 작은 방은 오래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다락이 있었다. 다락은

걸상을 놓고 두 팔로 몸을 들어 올려야 하는 높이에 있어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바람으로 다락을 열었다. 구석에 이부자리며 방석, 낡은 가방들이 쌓여 있었다. 집안을 뒤져 발디딤 될만한 물건들을 주워 모아 간신히 다락으로 올라갔다. 다락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오래된 이부자리들과 출장이 잦았던 아버지의 낡은 여행가방들이 쌓여 있었다. 혹시나 이부자리 밑에 무엇이 있을까 하고 들춰내자 기다란 가죽 가방이 나왔다. 보기에도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가방이었다. 지퍼를 잡아당기자 미끄러지듯 열리면서

엽총이 나왔다. 순간 와! 하는 탄성이 나왔다. 이 총은 아버지가 강원도 광산에 근무하실 때 사용하시던

총이었다. 오랫동안 눈에 안 띄어 잊고 있었는데 다락 안에 고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기억이 새로웠다. 중고등학교 여름방학을 늘 광산에서 지냈는데 아버지는 가끔 꿩이나 멧돼지 등을 사냥해

오셨다. 부엌살림을 하는 아주머니들은 꿩으로는 꿩만두를 만들고 멧돼지로는 불고기를 만들어 주셨고

그 맛은 어느 식당의 요리보다 더 맛있던 음식 들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아버지가 사슴을 사냥해 오셨다. 부엌 뒷마당에 놓여 있던 죽은 사슴의 눈을 보는 순간 난 도망쳤다. 그 사슴이 커다란 검은 눈으로 나를 슬프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사슴은 여름 방학 내내 꿈속에 나타나 그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일 이후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사냥해 온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사냥총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나무와 검은빛을 띤 메탈로 만들어졌고 중간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은빛 색깔의 메탈이 덥혀 있었다. 가격이 얼마나 될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으나 어렴풋이

상당히 비싸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 올랐다. 이불속에 있었던 탓인지 가죽 가방은 깨끗했고 총에서는 쇠붙이 냄새가 남아 있었다. 친구에게 여권과 가죽 가방을 넘겨주며 총에 대한 역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친구한테 출국 허가증이 달린 여권을 돌려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친구의 말로는

비행기표와 여권을 가지고 출국 날자 전에 공항에 가서 공항에 나와 있는 병무청 창구에서 출국허가 도장을 여권에 찍어 줘야 비행기를 탈 수가 있다고 했다.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던 나이였지만 절차를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만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출국 이틀 전에 여권을 들고 공항으로 갔다. 이리저리 물어 간신히 병무청 창구를 찾았는데 창구 앞에

서너 명이 줄 서 있었다. 나도 가서 줄을 섰는데 누군가 다급히 뛰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권을 손에 들고

거의 울상인 한 청년이 뛰어 왔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가까웠는데 출국 도장을 받아야 한다며 줄 선

사람들한테 양해를 구하며 창구 앞으로 갔다. 그런데 도장을 도장을 찍는 군인인듯한 청년은 점심시간이라며 한 시간 후에 다시 오라는 말을 하고 창구 문을 닫으려 했다. 울상이 된 청년이 여권을 들이밀며 비행기 출발 시간 다 되어 간다고 제발 좀 찍어 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그 군인은 매몰차게 문을 내려 버렸다. ……….


반세기 전의 기억이지만 나는 아직도 두 청년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절망과 비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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