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이 빨리 날수록 좋은 회의일까?

by 이일우

KBS에서 〈1박 2일〉을 성공시킨 나영석 PD의 인터뷰를 인상깊게 본 적이 있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의 前 기자 고재열의 브런치 스토리 중 2021. 1. 18. 게시된 “나영석이 말하는 회의 잘하는 비결”이었다. 그 글의 일부를 발췌해본다.

고재열 기자 : 긴 회의를 즐긴다고 들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회의를 소모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회의에 대한 생각이 일반인과 다른 것 같다.

나영석 PD : 회의에서 정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노하우라면 노하우인 것 같다. 어차피 정답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확률 높은 답을 내놓을 수는 있겠지만 아무도 정답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회의에서는 연차가 낮을수록 말을 잘 안 하게 된다. 자기 생각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다 들어보려고 일부러라도 의견을 묻는다. 그들은 그들 또래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취향이나 성격을 평소에 파악해두고 있다. 그래서 누구를 대변하는지 다 파악하고 있다. 그들의 반응을 취합하면 그 아이템에 대한 대강의 그림이 그려진다. 그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린다.

고재열 기자 : 너무 빨리 결론이 나면 뭔가 잘못된 것이라 보고 회의를 다시 한다고 들었다.

나영석 PD : 결론이 빨리 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빤한 아이템이라는 얘기다. 모두가 동의하는 아이템은 가장 위험한 아이템이다. 기승전결이 쉽게 읽히는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이 빨리 나면 아 이건 다시 생각해봐야지, 하고 회의를 되돌린다.

결론이 빨리 날수록 뻔한 아이템이라니. 역시 스타 PD의 발상은 달랐다.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사라지고 마는 정글같은 예능프로그램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나영석 PD다웠다. 너무 튀지도 뒤처지지도 말고 적당히 중간만 가면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공무원 선배들의 말과 너무 달랐다. 나인 투 씩스의 반복된 일상을 사는 직장인들과 다르게 동료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식상함과 상투성을 지양하려는 일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좋았다. 물론 예능프로그램과 의회의 상임위 회의를 그대로 비교할 순 없다.


구의회 상임위 회의는 일찍 끝날수록 좋은 걸까? 가결이든 보류든 기각이든 안건에 대한 결론이 빨리 날수록 상임위 담당 직원들은 좋을 수 있다. 그만큼 노동시간이 줄어 신경 쓸 일이 없어지니까. 결론이 빨리 나려면 상위법령 개정을 단순 반영한 쟁점이 없는 안건이거나 의원들 간에 미리 처리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구청장이 제출한 조례개정안이 이러저러해서 이번엔 영 아닌 것 같다든지, 모 의원이 발의한 조례안은 시기상조라 이번엔 보류하고 다음에 심사하자든지 하는 것을 말한다. 구청장이 제출한 안건의 경우 당연히 빠른 시간 내에 원안대로 가결되는 것을 담당 부서는 가장 좋아한다.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는 것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의원들의 질의답변이 길어지고 급기야 정회를 하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면 안건의 소관부서 과장과 팀장은 애가 타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자칫 보류나 기각으로 결론이 나면 사업 추진일정에 차질이 생길 뿐만 아니라 구청 윗선에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난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출직과 행정직 공무원의 시계는 다르다. 절차와 규정을 우선하는 행정직 공무원과 달리 정무적 판단을 우선하는 것이 선출직이다. 그렇다 보니 복잡해 보이는 안건이 의외로 속전속결로 결론이 나기도 하고 쉽게 통과될 거라 예상했던 안건이 예상외로 보류되기도 한다. 적어도 정치의 영역에서는 신속성만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독재나 전체주의와 달리 다양한 의견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의 속성이 그렇지 않은가.


지방의회에는 상임위나 본회의 말고도 여러 가지 원내 회의가 많다. 의원연구단체에서 발주한 연구용역 착수·중간·최종 보고 회의, 의원 총회, 각종 민원 관련 간담회 등이 그것이다. 00구의회는 임시회를 앞두고 의사일정을 결정하기 위한 의회운영위가 끝나면 곧바로 의장실에서 의장과 부의장, 상임위원장, 교섭단체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의장단 회의를 개최한다. 의장단 회의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공식 회의 기구는 아니지만 곧 있을 회기의 의사일정과 의회 현안, 주요 행사 일정 등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의회사무국 팀장급 이상 직원도 의장단 회의에 배석한다. 어느 봄날의 의장단 회의는 구청과 구의회의 신청사 이전으로 개청식 일정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했다. 임시회 기간과 겹치지 않게 개청식 일자를 잡자는 것이 당초 취지였는데 늘 그렇듯이 의원들의 질문과 답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신청사 개청식을 구청과 의회가 함께 할 것인가 의회만 따로 할 것인가? 임시회 일정을 개청식 뒤로 미룰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오가다 보니 어찌 된 일인지 연초 구의회 시무식 일정까지 얘기가 확대되었다. 그러자 뜬금없이 의장단에서 결정한 사안에 불만을 제기하는 일부 의원들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의장단 회의 결정 후 의회운영위에서 결정한 것을 다시 의총에서 결정해야 하나? 어느 의원은 지역 언론사와 구의원들의 연중 간담회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기도 했다. 임시회 의사일정 보고 건 외에 안건이 불과 한두 개였던 그날 의장단 회의는 시작한 지 벌써 1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이처럼 의원끼리의 모임인 의장단 회의조차 매끄럽게 진행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안건조차 매끄럽게 진도를 못 나가는 경우도 흔하다. 생산적인 논의때문이라면 환영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특정 의원만의 리더십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의원의 전반적인 의사소통 수준과 개선방안을 고민해 보자는 취지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발언 요지를 끝까지 듣지 않고 지레짐작으로 엉뚱하게 반응하는 경우는 다반사이다. 굳이 선출직이 아니더라도 말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그 모임이나 회의의 ‘맥락’을 파악해 말을 할 텐데 이런 기본적인 소통의 기본조차 부족하다. 그러니 의장단 회의나 상임위 회의는 종종 중구난방이고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행여나 이 모습을 주민들이 지켜본다면 오래전 모 개그프로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봉숭아학당’을 떠올리기라도 할까 봐 나는 전전긍긍했다. 국민 MC라는 유재석이나 100분토론의 손석희 앵커가 구의회 의장단이나 상임위 회의를 진행하면 뭐가 다를까?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특성상 비효율적인 회의는 당연할까? 지방의원이 상대방 발언의 핵심 파악 능력, 발언 중간에 말을 자르지 않고 경청하기, 의제 외의 발언 자제하기, 의제의 경중과 시급성을 따져 선택과 집중하여 논의하기 등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을까? 지방의원이 민주적 의사소통과 회의 진행을 잘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소통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 지도자일수록 소통과 거리가 멀다던데, 지방의회의원의 민주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시급하다. 아쉬운 대로 검토보고서를 통해서 상임위 회의라는 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노력한다. 심의 안건에 대한 다양한 착안사항을 검토보고서에 제시함으로써 의원들의 질의답변이 생산적인 회의라는 과녁의 정중앙에 명중하진 못하더라도 과녁 어딘가엔 꽂힐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소통을 원한다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고 모르는 것이 많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겸손이 대화의 출발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2025년 3월 개봉한 영화 “콘클라베”는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콘클라베(conclave)는 가톨릭에서 교황을 선출하기 위하여 추기경들로 이루어진 선거인단과 그 선거를 하는 비밀회의를 뜻한다. 언뜻 이 설명만 들으면 고리타분한 종교영화로 단정짓기 쉽지만 실제로는 어지간한 정치영화 뺨칠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한동안 SNS에서 회자된 로렌스 추기경(랄프 파인즈 扮)의 영화 초반부 대사가 있다. 확신만이 가득하기 쉬운 지방의회에서 대화와 타협의 출발은 각자가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 아니겠는가.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선물이 바로 다양성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에 힘을 주는 것은 사람과 견해의 다양성입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두려운 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강력한 적이며,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조차 마지막 순간까지 확신하지 못하셨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며 고통 속에서 절규하셨지요.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이유는 의심과 함께 걷기 때문입니다. 만약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함도 사라지고, 결국 믿음조차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 주시길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이전 07화지방의회의원은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