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송해와 상임위원장

by 이일우

구의회 전문위원으로 이직하고 몇 년쯤 지났을 때였다. 추가경정예산안(이하 ‘추경안’)을 심사할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이하 ‘예결위’)의 위원장으로 선출된 Y 의원이 어느 날 의원실로 나를 조용히 불렀다. 초선에 야당인데도 Y 의원은 운 좋게(?) 예결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Y 위원장이 내게 넌지시 물었다.

“전문위원님, 위원장이 회의 진행을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거예요? 처음이라 감이 안 오네.”

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지방의회 상임위원장이나 예결위원장을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매뉴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위원장의 역할을 A부터 Z까지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고작해야 지방자치법이나 구의회 회의 규칙에 있는 위원장의 권한 규정을 아는 것이 전부였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날은 원론적인 수준에서 짧게 답변하고 의원실에서 나왔다. 그때가 처음으로 지방의회 상임위원장과 예결위원장의 회의 진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계기였다.


그러고 보면 국회 상임위원장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여야가 치열하게 다투는 광경은 낯이 익은 뉴스이다. 도대체 상임위원장이 뭐길래. 국회의 경우 통상 3선 의원이 맡는 18개 상임위원장은 정당 의석수에 비례해 나눈다. 상임위원장은 '국회의원의 꽃'으로 불린다. 대내외 행사에서 장관급 예우를 받는다. 상임위 사회권을 갖고 있고, 지역구 예산확보에 유리하다. 피감기관을 통해 지역구 민원을 해결하는 경우도 적잖다. 국회 본청에 넓은 사무실을 제공받는다. 특활비 폐지로 타격은 입었지만 지금도 월 300만원을 쓸 수 있다. 자신이 200만원을 쓰고 여야 간사에게 50만원씩 주곤 한다. 이 때문에 3선 의원들은 앞다퉈 상임위원장을 노린다. 자리는 한정됐는데 후보가 많다 보니 20대 국회 당시 통합당은 2년 임기의 상임위원장을 1년씩 쪼개서 맡기도 했다. 아무튼 내가 궁금했던 점은 상임위원장의 권한이나 혜택이 아니라 회의진행에 한정된 것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Y 의원에게 KBS 전국노래자랑의 장수 MC였던 故 송해의 사례를 말씀드렸다. 출연자 이름과 곡명만 기계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진행자의 역할이 아니며 특이한 출연자는 일부러 우스꽝스런 에피소드를 유도해 시청자에게 보는 즐거움을 주면서 프로그램 전체의 완급을 조절하는 게 MC 송해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동료의원들의 질의를 적당히(?) 칭찬하거나 요약하고 집행기관 공무원들의 답변 태도를 단도리하며 적절한 타이밍에 정회를 선포해 회의장의 열기를 식힐 줄 알아야 예결위원장의 존재감이 뿜뿜이라고 말이다. 예결위 회의의 시작과 끝은 결국 위원장의 입에서 시작하고 끝난다는 점도 잊지 않고 강조했다. 무대 격인 회의장뿐 아니라 무대 밖에서도 예결위원장은 본인이 하기에 따라 다양한 의제를 주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내 설명을 들은 Y 의원의 표정에서는 전과 다른 안도감이 느껴졌다. 상대적으로 소장파에 속하고 구의원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크고 작은 사회 경험을 쌓았던 Y 의원이라 금방 감을 잡은 것 같았다. 적어도 회의 진행만큼은 故 송해를 닮아보자는 비유에 나 자신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Y 의원은 자신감을 가지고 회의에 임할 수 있었다.


아뿔싸! 임시회가 끝나갈 무렵 내가 중요한 사실을 놓쳤음을 깨달았다. 예결위원장이든 상임위원장이든 회의 진행은 생방송이지만 전국노래자랑은 녹화방송이라는 점이다. 방송 MC와 회의진행자는 전제조건부터 큰 차이가 있다. MC 송해의 유머나 능청스러운 애드립은 아무리 길어도 상관이 없다. 전체 방송 시간에 맞춰 제작진이 삭둑 자르고 이어 붙이면 그만이니까. 반면에 늘 생방송인 상임위 회의를 무작정 전국노래자랑처럼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MC 송해처럼 하시라고 조언했으니 아차 싶었다. 천만다행으로 Y 의원은 개떡같은 전문위원의 조언을 찰떡같이 소화해 회의 중간중간 멘트를 순발력있게 편집해 전체 회의 시간을 조절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던 기억이다. Y 의원이 내 조언을 곧이곧대로 이해해 행동했다면 어쩔 뻔했을까. 얼핏 보면 직원이 써준 시나리오대로 읽고 의사봉만 두드리면 되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크고 작은 이해관계가 얽힌 지방의회에서 막상 회의 진행을 물 흐르듯이 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다양한 상임위원장, 예결위원장을 접하면서 좋은 상임위원장의 요건으로 꼭 추가하고 싶은 한 가지가 바로 잘 듣는 것이다. 우리는 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면서도 어려운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잘 듣는다는 것은 결코 예스맨도 아니고 돌부처처럼 무심하게 듣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듣기의 관건은 ‘말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마음을 열 수 있느냐’라고 본다. 흥미로운 점은 상임위를 무난하게 이끄는 상임위원장일수록 잘 들을 줄 아는 공통점이 있었다. 즉 상대의 말을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지 않으며 상대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잘 포착해서 들었다. 개성이 강하고 주목받기 좋아해 소위 ‘기가 센’ 선출직 의원들을 상대로 상임위원장을 맡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잘 듣는 위원장일수록 정치적 역량도 높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저자강연에서 ‘말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청중의 질문에 은유 작가는 ‘잘 들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일본의 유명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어느 청중이 ‘좋은 배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더니 역시 감독의 답변도 ‘잘 들어야 합니다.’였다고 말해서 모두가 웃었던 적이 있다. 질문은 달라도 답변은 같았다.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잘 듣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고인이신 MC 송해도 출연자의 말과 정서를 누구보다 잘 포착했기에 최장수 MC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전 08화결론이 빨리 날수록 좋은 회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