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영화를 재미있게 보기 위한 상식적인 이야기들

<열네 번째 글> 스토리 9. 물리적 조건이 예술 방식을 결정합니다

by 김용태
image.png ≪햄릿≫ 1막 1장

≪햄릿≫은 뜬금없이 바로 그렇게 시작합니다.


바나도와 프란시스코는 보초병입니다. 바나도가 “국왕 만세”라고 외치는 것은 보초 교대를 위한 일종의 암구호입니다. 1막 1장 내내 햄릿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첫 장면부터 햄릿을 보고 싶어 했을 텐데 말입니다. 실망일까요? 도대체 셰익스피어는 왜 이렇게 시작하는 것일까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시의 ”극장 구조 때문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작고하신 셰익스피어 님을 찾아가 물어볼 수는 없으니 지극히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당시 극장의 상황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1601년 5월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 ≪햄릿≫ 공연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미 런던에서 가장 잘 나가는 극작가 중 하나였고, ≪햄릿≫이라는 신작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있습니다. 멋지게 차려입은 귀족 남녀들이 극장을 찾아옵니다. 평범한 시민들도 있고 여기저기 부랑자들도 섞여 있습니다. 극장은 만석입니다.


그러나 무대 첫 장면은 화창한 오후와 전혀 다릅니다.


1막 1장, 심한 추위 속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깜깜한 밤입니다. 바로 앞에 누가 있는지 분간조차 안 되니 암호를 대라느니, 뼈를 애는 듯한 추위라느니 하는 대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따스하고 밝은 대낮에 행해지는 공연에서 짙은 어둠 속 추워 벌벌 떠는 장면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극 무대에는 표현 기술의 한계가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21세기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당시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이쯤에서 16세기 후반 런던의 대중용 극장 구조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6세기 중반 연극이 점점 인기를 끌게 되면서 일어난 문제는 상설 극장의 부재였습니다. 연극 공연을 위한 전용 극장이 없었다는 밀입니다. 연극이 사업이 된다고 생각한 제임스 버비지(James Burbage)라는 공연 기획자는 1576년 런던에 “극장 The Theatre”이라는 최초의 대중들을 위한 상설 극장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 우후죽순처럼 여러 대중용 극장들이 주변에 들어섭니다.


이들 대중 극장들의 구조는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외관은 팔각형 또는 원형이고 벽을 따라 지붕이 얹혀있고 가운데 부분은 노천인 목조 건물입니다. 극장마다 평균 1,000여 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지 않았습니다. 공연 시간은 해가 떠 있는 오후일 수밖에 없었지요. 커튼도 없었고 무대 장치나 장식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중극장의 무대를 흔히 “벌거벗은 무대 bare stage”라고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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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ng 16-17세기 런던의 대중극장


상황을 표현해 줄 무대 효과 장치가 전무하여 대사를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술 행위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연극은 “보여주기”보다는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대체로 그러합니다. 영화에 비해 연극 무대의 표현력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무대 효과 장치의 결핍 문제는 대사를 통해 그리고 관객들의 너그러움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이 장면을 통해 연극 관극의 필수적인 태도를 제시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햄릿≫ 전체에 흐르는 암울한 분위기를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극장의 물리적 조건이 이러한 대사가 필요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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