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글> 스토리 10. 연극의 적극적인 관객 서비스 정신...
어떤 예술이든 본질적인 속성은 그 매체의 물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연극이 그렇습니다. 연극 무대의 표현력 한계라는 조건이 연극의 본질적인 속성을 결정합니다. 연극은 어느 공연 매체보다 더 관객들에게 정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력 부족을 서비스 정신으로 보충하려는 것입니다.
관객이라는 존재는 연극의 대본인 희곡의 구조를 결정합니다.
희곡은 관객이라는 존재를 우선 상정해야 합니다.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스토리 매체라는 점에서 희곡은 소설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무대 공연을 목적으로 하는 희곡은 나름의 고충이 있습니다. “분량의 제한”입니다. 가령, 5시간 공연은 관객에게 무리이지요. 관객을 고려하지 않은 연극이라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소설은 대체로 분량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한 시간 독서량도 좋고 한 달 독서량도 가능합니다.
연극의 속성 중 하나가 되돌리기 어려운 일회성입니다.
극작가는 주어진 공연 시간 내에 관객이 즉석에서 바로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스토리가 되도록 명료해야 하고, 당대와 밀접히 연결된 내용을 다루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순간순간 극의 스토리를 따라가기 편합니다.
소설 독자의 경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맞닥뜨리면 시간을 갖고 깊이 더 생각해 보거나, 정 아니면 아예 이전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으면서 이해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극 공연은 이렇게 하기 어렵지요. 한번 지나가면 되돌아가기가 불가능합니다.
가령, 인물의 이름 같은 경우, 한 번 듣고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단순한 게 좋습니다. 공연이 한창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배우들에게 “잠깐만요,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라고 물어볼 수도, 앞으로 다시 돌아가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소설은 길거나 어려운 이름을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기억나지 않는 경우 언제나 되돌아가 다시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시절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러시아 작가 소설을 읽을 때 인물들의 낯설고 장황한 이름은 참으로 저를 곤혹스럽게 했었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니 “니콜라예비치 볼콘스키”니 하는 이름은 웬만해서는 한 번에 기억하기 어려웠습니다. 수차례 앞으로 되돌아가 다시 확인해야만 했었지요.
물론 연극에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생소한 이국적인 이름이나 특별히 긴 이름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기억하기 쉬운 이름들이 보통입니다. 가령, 미국 극작가 아더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소시민을 상징하는 “로먼 Loman”이고 아내는 흔한 “린다 Linda” 등 기억하기 쉬운 평이한 이름들입니다. 이름 하나 짓는 데도 관객 배려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관객들이 스토리를 편안히 따라오도록 스토리의 구조도 간결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여진성” 즉 현실성을 높여줍니다. 연극에 대해 최초로 정의 내렸다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책 ≪시학≫에서 희곡은 24시간 내 벌어지는 이야기로, 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스토리 만을 다루도록 요구한 바 있습니다. 나중에 학자들은 이를 연극의 "삼일치 법칙"으로 규정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이런 요구를 했을까요? 관객이 스토리 전개를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관객을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무대 위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여진성이 분명해진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요구가 지나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은 관객 서비스 정신입니다.
이외에도 연극은 여러 면에서 관객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