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번째 글> 에피소드 4. 연극을 보고 실망했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실제가 아닌 가상의 경험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나이 50을 넘어 처음으로 연극 공연을 보게 되었다는 가상의 상황으로 시작합니다.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헨리 5세 Henry V≫로 하겠습니다. 부친 헨리 4세를 이어 잉글랜드의 군주의 자리에 오른 헨리 5세는 프랑스 군대와 역사적인 아쟁꾸르 전투를 앞두고 있습니다. 군사들을 향해 “우리의 수는 적다. 적어서 행복하다. 우리는 한 형제다. 오늘 나와 함께 피를 뿌리는 자들은 형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합니다. 군사들은 환호하며 헨리 5세와 함께 죽기를 각오합니다.
그러나 무대 위에는 주인공 헨리 5세와 대여섯 명의 군사들만 모여 있습니다. 대여섯 명의 군사들의 외침은 분명코 수만 대군의 함성이 아닙니다. 내 눈에는 동네 아저씨 몇이 모여 어설픈 작당을 하는 것처럼만 보입니다. 역사를 바꿀 대전투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는 “아... 이런... 이럴 수가”하는 실망스러운 탄식만이 절로 새어 나옵니다.
다음은 대평원에서 수만 명의 군사들이 부딪히는 유혈이 낭자한 처절한 전투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대 위 배우는 역시 대여섯 명에 불과했고 칼을 몇 번 부딪히고는 승리의 환호를 외칩니다. 이것이 어떻게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역사적인 대전투 장면이라 할 수 있겠는지요?
먼저는 저 무성의한 연출가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예산이 너무 부족해 이 정도의 인원밖에 동원할 수 없었나 하는 측은한 마음도 듭니다.
내 좌석은 맨 앞줄이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주인공 헨리 5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아뿔싸 아래층 아저씨였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서로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리 호감 가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낮술도 자주 하는 것 같았고 와이프와 늘 으르렁대던 분이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연극배우임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다음부터 그 아저씨는 아래 집 아저씨이지 헨리 5세는 아니라는 생각에 연극에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커튼콜을 할 때 모든 관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지만 나는 “뭐 이따위 허접한 연극이 다 있어? 입장료가 아깝다”라고 툴툴대고 있었습니다.
다른 관객들은 공연에 환호하는데 저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가요? 저 같은 사람은 연극 보러 올 자격이 없는 걸까요? 상상 속의 저는 연극에 대한 이해력이 참으로 부족했습니다.
연극의 무엇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