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문서를 출력해야 할 일이 생겼다. 마침 집 프린터가 고장나서 근처 문구점으로 가야했다. 하지만 급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미루기도 좀 그랬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지금 해치우기로 결정했고 가벼운 외출 준비를 했다. 공용현관을 나서자 차가 보였다. 집에서 문구점까지는 약 1km. 버스로 한 정거장. 애매한 거리였다. 하지만 운전도 귀찮아서 그냥 걷기 시작했다. 골목을 나와 대로변으로 나오자마자 흠칫 놀랐다. 초여름 햇볕이 이렇게 강렬할 줄은 몰랐다. 몇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따끔거리며 땀이 나기 시작했다. 짜증이 나면서 후회가 몰려왔다. 급하지도 않은데 왜 지금 굳이 나섰을까. 그리고 편한 차 놔두고 왜 굳이 도보를 택했을까. 지금 돌아가기도 한심하고 계속 걸을 수밖에 없는데 목적지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늘 한점 없는 거리는 잔인했다. 불쾌한 열기, 불쾌한 습기, 불쾌한 자책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다.
140대 초반 키의 왜소한 할머니가 채소가 가득 든 상자를 들고 가다가 힘에 겨운지 잠시 내려놓는 광경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러다 퍼뜩 어떤 생각이 스쳐 되돌아갔다. 그 생각이란 걸 굳이 구체화하자면 그건 상황에 대한 일종의 <타계책>이었다.
난 말도 없이 다짜고짜 할머니의 짐을 번쩍 들어올렸다. 세상에 채소 상자를 빼앗아가는 강도도 있나? 하는 눈으로 날 보던 할머니는 이내 감격의 표정을 지었다. 난 성큼성큼 걸었다. 할머니는 계속 감격하며 종종걸음으로 날 따라왔다. 그렇게 1km를 걸었다. 상자는 제법 무거웠고 중간에 손을 한번 바꿔야 했다. 살의 따가움과 쏟아지는 땀은 정확히 두 배가 되었다. 하지만 짜증이 사라졌다. 할머니로 인해 생긴 명분이 조금 전까지 날 괴롭히던 불쾌감 <이 날씨에 굳이 왜 나왔을까>를 완벽하게 털어냈다. 난 할머니를 돕기 위해 나온 거니까.
상자를 돌려드릴 때 할머니는 고맙다는 말로 고마움을 표현했고 난 별말씀을요. 라는 말로 역시 고마움을 표현했다. 철저히 이기적이었는데 이타적 인간이 되었다.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아니, 쉬운 세상이었다. 불의에 맞서는 게 어렵지 착한 일 하는 건 너무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