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자 A는 여자 B를 사랑했다.
여자 B도 남자 A를 사랑했다.
누가 더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를 극한으로 원했다.
그래서 결혼했다. 다른 이유 없었다. 서로가 없이 산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어서였다.
결혼 이후 기존의 연애에 현실의 무게가 얹어졌지만 그들의 열정은 잔잔해질지언정 식지는 않았다.
아이가 생겼다. 엄마 B를 빼닮은 예쁜 딸이였다.
아이는 어느새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고 그들의 가정은 동화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모양새가 갖춰졌다.
아이가 5살 되던 해 어느날 남편 A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B는 삶의 모든 의미를 잃었다. 슬픔을 넘어 절망이었다. 아이를 안고 멍하니 거리를 활보하는 일이 잦아졌다.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치유되지 않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혼자 의미없이 중얼거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단 한바탕 울고 하루를 시작했다. 기계적으로 밥을 먹고 기계적으로 잠을 자며 시체처럼 살았다. 거울도 보지 않고 같은 옷을 며칠씩 입는 일도 잦아졌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걱정하다가 결국엔 점점 그녀를 멀리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한 학년 한 학년 올라가던 어느날 문득, B는 창가의 화분에 날아든 나비 한 마리를 보며 갑자기 예쁜 옷을 입고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시간의 위대함을 느끼며 거울을 보고 웃었다.
그렇게 그녀는 A를 극복했다.
일단 이사를 간 후 다시 일을 시작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마음도 훨씬 단단해졌다. 웬만한 실망엔 눈도 깜짝 하지 않았고 인간에 대해서도 관대해졌다. 작은 일에 충실하게 됐고 순간을 즐길 줄도 알게 됐다.
가끔씩 불시에 기습적으로 A가 생각났다. 그럴 때마다 B는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녀는 되도록 A를 떠올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바쁜 일상 속에 그것마저 뜻대로 됐다.
B는 이제 사는 게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좋아했고 몇몇 남자들은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시했다.
낯선 남자한테 스토킹도 당해봤다. 하지만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우연히 그녀에게 반한 듯한 스토커는 한 달을 넘게 말없이 그녀를 쫓아다녔지만 그녀는 태연자약했다. 그녀의 흔들림없는 무심함에 질려 결국 스토커는 제풀에 지쳐버렸다.
이후 그녀는 다가오는 남자들 중 하나를 선택했다. 실로 오랜만에 설레임을 느꼈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달콤함도 다시 누렸다. 아이도 비뚤어지지 않고 엄마와 적절히 교감하며 잘 자라고 있었고 이제 잔잔히 늙어가는 일만 남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A가 돌아왔다.
집 앞에서 A와 마주친 B는 순간 숨이 멎었고 이어 정신을 잃었다.
엄마와 함께 외출했다 들어온 14살 딸아이는 그가 또 다른 스토커인줄 알았다. 자기와 닮았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A는 사고로 죽은 뒤 구천을 떠돌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산이 있고 강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사실상 형체를 분간할 수 없었고 얘기라도 나눌까 싶었지만 비슷한 처지의 존재들도 없었다. 여기저기를 하염없이 배회했다. 육체적 고통은 따로 없었지만 그는 미칠 것 같았다. 아내와 딸이 너무 보고 싶었다. 소리 질러 울어보았지만 자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인지 몇 년이지 모를 시간동안 그는 알 수 없는 세상을 배회하다가 어떤 존재를 만났다. 옥황상제인지 염라대왕인지 산신인지 아니면 외래신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엄청나고 절대적인 존재였다. A가 그 존재의 형체를 보았는지, 말을 섞었는지 무언의 교감을 했는지 전혀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의 간절함이 그 절대적 존재에게 인정을 받았고 이어 배려인지 은총인지를 받았다.
노숙자 하나가 공중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돈도 지갑도 신분증도 휴대폰도 없었다. 당장 밥먹을 곳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얼굴을 처음 본 양 하염없이 거울만 바라봤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주변 노숙자들마저 그를 보고 어디서 왔냐며 텃새를 부렸다.
그는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고 무료급식소를 찾아가 끼니를 떼운 뒤 곧장 B를 찾아갔다.
이사 간 B의 집을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는 그때부터 한 달여 간 그녀를 따라다니며 훔쳐봤다. 차마 앞에 나서진 못했다. 몇 번은 그녀와 눈도 마주쳤지만 그는 무시당했다.
어느 순간 그는 그녀 앞에 나서기 위해 손과 얼굴을 씻고 옷을 빠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는 일도 그만두고 되는대로 비박을 했다.
어차피 병이 있는 몸이었다. 그는 얼마 후 객사했다. 사인은 폐렴이었고 신문에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다.
중국 칭하이성,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산간 마을에 아내와 자식 셋, 그리고 노모를 모시고 사는 30대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혼비백산한 가족들은 마을의 의원도 불러보고 무당을 불러 굿도 해 봤으나 소용이 없었고, 남자는 단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할 뿐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며칠 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남자는 홀연히 사라졌다.
정신이 돌아온 B는 A의 얼굴과 온몸을 구석구석 만져봤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A도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둘은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고 만져보며 같이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감동없이 황당하기만 한 사춘기 딸을 안고 한번 더 눈물을 흘린 다음에야 비로소 말을 시작했다.
당신 두고 떠나는 게 너무너무 억울했어. 그래, 언젠가는 죽겠지만 이렇게는 아니잖아. 그러다 신을 만났어. 어떤 신이냐고? 그건.. 모르겠어. 어쨌든 간절히 빌었지. 기도가 통했어. 다른 사람의 몸에 내가 들어간거야. 곧장 이리로 왔지. 근데 당신은 날 못 알아봤어. 당연하지 내가 아니니까. 혼자 이런저런 궁리를 해봤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더라. 정말 죽고 싶었어. 그래서 그런지 정말로 죽더라구.
신은 바보야. 내가 무슨 웅녀도 아니고 단지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잖아.
그리고 무작정 돌아다녔어. 계속 중얼거리면서. 그게 신세한탄이었는지 기도였는지 모르겠어. 내 목소리가 안 들렸거든.
.. 근데 어느 순간 내 목소리가 들리는거야. 둘러보니까 사람사는 세상이더라. 제일 먼저 거울부터 봤지. 기절할 뻔했어. 세상에 나랑 똑같은 사람이 있었던거야. 그냥 닮은 게 아니라 아예 똑같았어. 당신하고 똑같은 여자도 지구상에 한 명쯤은 있을거야 아마. 인종하고 국적빼곤 완전 같은 사람이었어. 거기 사람들한테 내 처지를 얘기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듣더라. 거기가 중국 어디더라? 산속이었는데 옥수수밭이 잔뜩 있었어.
북경까지 오는데 차를 몇 번 갈아탔는지 몰라.
그 말을 B는 모두 믿었다. 안 믿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사춘기 딸은 A가 이야기하는 중간에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B가 뒤쫓아 들어가 딸을 나무라는 동안 A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날밤 A와 B는 애절한 몸짓으로 섹스를 했다. 그리고 벌거벗고 누운 채로 A는 B가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B는 직장에 휴가를 냈고 딸이 다니는 학교에도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셋이서 여행을 떠났다.
다시 뭉친 가족은 1주일동안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경치를 봤다.
돌아와서는 바로 집을 내놓고 교외의 농가주택을 개조한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나서 B는 그동안 만나던 남자를 정리했다.
그동안 행복했던 남자는 영문도 모른 채 상처를 받았다.
9년만에 제자리를 찾은 A는 삶의 순간 순간이 감격이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한동안 그랬다.
그리고 그 한동안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면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A는 거의 집 밖을 나가지 않았고 B는 직장에서 퇴근만 하면 바로 집에 들어와 A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반대로 딸은 대개 저녁을 먹고 늦게 들어왔다. 들어와서도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A는 그녀의 맘을 열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모녀 간의 대화 시간도 줄어들었다. 엄마 B는 그런 딸을 일단 관망했다.
6개월간의 연애와 무위도식 후, 이제 A는 이후 삶에 대하여 결정을 해야 했다. 그는 현재 아무런 경력이 없었다. 졸업증명서도 없었다. 사망 전까지 출판 업계에서 일했으나 그건 되살릴만한 기술도 아니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인적없는 곳으로 가서 자급 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그건 가당치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이 마흔에 새롭게 시작할 것도 마땅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신분증이 없었다. 신분도 없었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죽은 노숙자의 명의를 도용해 신분증과 보험카드, 여권을 만들자는 제안을 한 사람은 아내였다. 여기에 적지 않은 돈이 들었고 드디어 신분이 생기자 A는 일용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또 다시 6개월이 지났다.
엄만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 그게 무슨 말이니?
저 사람이 우리 아빠라구?
/ 뭔 얘기야, 아빠가 가짜란 거니?
죽었다며?
/ 죽었지. 그리고 부활했지. 아기때 너 안고 찍은 사진 못 봤어?
봤어. 근데 아빠란 사람 죽은 거 맞어?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몰라 아무튼 말이 안 돼. 이런 이상한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엄마도 이상해. 우리가 이런 깡촌으로 이사와서 희생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 그만 하자.
엄마 무슨 사이비종교 신도같애!
/ 그만해!!!
어느날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A는 이 대화를 모두 들었다.
새로울 것도 없었다. 자신이 제자리를 찾아온 것에 대한 댓가로 모녀는 희생을 했고 그중 딸만은 그게 억울한 것이다.
지금 상황이 비정상이라면 해결을 해야 할 것이다. 하긴 자신이 돌아온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 것이다. 비정상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교통사고도 비정상이었고,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 서로에게 빠져들고 새 생명을 탄생시킨 것도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탄생시킨 새 생명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A는 그것 역시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안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이상한 방식으로 돌아왔다 해서, 그리고 무능한 아빠라고 해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A는 B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딸에게 작정하고 다가갔다. 하루에도 수차례 대화를 시도했고 수시로 전화해서 안부를 물었다. 굳이 데려다주고 굳이 마중을 나갔다. 신을 납득시킨 그에게 사춘기 인간 소녀 정도는 우스웠다.
역효과가 났다. 견디다 못한 딸은 집을 나가버렸다.
이 때에도 B는 침묵했다.
1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A는 이전처럼 간간히 일을 하며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오직 B만 바라보고 살았다.
B는 여전히 아내로서 A에게 충실했다. 동시에 같이 살지 않는 딸에 대한 엄마 노릇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술을 먹고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1주일에 두세 번, 취한 얼굴로 들어와 조용히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런 B의 변화를 A는 말없이 지켜봤다.
어느 날이었다. 역시 취해서 들어온 B는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고 A를 쳐다봤고, A는 불안한 심정으로 B와 마주 앉았다.
자기 혹시 후회되지 않아?
/ 뭘?
음....
/ 뭔데? 혹시..
혹시 뭐?
/ 내가 돌아온 거 얘기하는 거야?
아니. 진작에 커밍아웃하지 않은 거.
/ 커밍아웃이라니?
당신.. 이렇게 숨어사는 거 불편하지 않아?
/ 나한테 다른 방법이 있었나?
그냥 아예 처음부터 주변 사람들 놀래키고, 인터뷰같은 것도 하고.. 떳떳하게 당신 이름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 그 생각이 왜 이제야 들어?
요즘 당신이 의기소침해보여서 그래.
/ 그럼 지금이라도 세상에 나서면, 사람들이 믿어줄까?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던 일인데.
증인들이 너무 많잖아.
/ 그래, 한동안 난리가 나겠지. 난 유명해질거고. 그런데 그 다음엔 어떻게 살지?
당신이 본 사후 세계를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거지. 종교에 관해서도 그렇고.
/ 사실 본 게 없어. 그냥 온통 안개 뿐이었어. 신을 만난 것 같긴 한데 그게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얘기한다 한들 아무도 안 믿을거야. 어쩌면 광신도들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순교하겠지. 하하.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 혹시... 당신이 불편한거야?
무슨 얘기야?
/ 내가 아니라, 혹시 당신이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냐구.
나는.. 당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아직도 감격하고 있어. 못 믿어?
/ 사실은 내가 더 감격하고 있어. 난 지금 돈이 있고 없고, 의기소침이고 뭐고가 문제가 아냐. 이렇게 다시 살아서 공기를 마시고, 당신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건 엄청난 행운인거지. 더 이상 내가 뭘 바라겠어? 난 지금이 최상이야.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죄악이야 죄악. 바라지도 않고.
.. 그게.. 언제까지 갈까?
B의 마지막 말은 진한 여운을 남겼다. A가 말했던 '삶에 대한 예찬'은 애처로운 진실이자 확연한 거짓말이었다.
다시 삶을 얻은 것은 최고의 기적이었다. 그에 대한 감동은 조금도 식지 않았고 그의 하루하루는 환희가 맞았다. 반면에 이전 생을 합쳐도 이토록 불편하고 불안한 적이 없었다. 지난 1년 6개월간, 그가 있었던 자리는 사실상 가시방석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아내가 자신을 다시 처음 본 날의 표정은 '난처함'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표정이 이후로 사라지지 않고 간간히 계속 나타났다는 것을.
그가 돌아온 이후 그들 부부는 단 한번도 싸움을 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뭔가 언짢은 조짐이라도 보이면 상대방은 서둘러 수습하곤 했다. 조심해도 너무 조심했다. 갈등이란 게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행복이 언제까지 갈까?>는 지금까지 B가 했던 최고의 언짢은 표현이었다.
A는 생각을 했다. 더 조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서서히 그는 아내의 심기를 살피는 데 도사가 되어 갔다. B 역시 그 이상의 친절과 배려로 보답했다.
그렇게 6개월이 또 흘렀다. 6개월동안 문제라면 문제고 아니라면 아닌 상황이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지속됐다.
어느 날 딸이 혼자 있는 A를 찾아왔다. A는 오랜만에 보는 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동안의 행복이라 믿었던 감정들이 마구잡이로 치밀어 올랐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고 소리치며 뺨을 한 대 갈기고 싶었다.
그런 그를 향해 딸이 뱉은 첫 마디가 “아빠..”였다.
그는 전기에 감전된 듯 깜짝 놀랐고 그동안의 행복이 진짜였일지도 모른다고 서둘러 생각했다.
울컥 다가가 딸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딸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 그래, 할 말이 있으니까 왔겠지. 무슨 일 있니?
요즘 잘 지내죠?
/ 그럼. 더할 나위 없지. 나야 뭐 원래..
다행이예요.
/ 너...
왜요?
/ 이제 날 인정하는거니?
인정하건 말건 아빠는 아빠잖아요.
/ 하...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나 사실 아빠 걱정 많이 해요.
/ .. 고맙다.
물론 엄마가 더 걱정되긴 하지만,
/ 엄마가.. 왜, 무슨 일 있어?
엄마가.. 불행해요.
그 말 이후로 A는 더 이상 딸과 대화를 주고 받지 못했다. 오로지 듣기만 했다.
딸이 들려준 내용인즉슨 이랬다 : 엄마에겐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부활하자마자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그 남자는 절망했고 이유가 궁금했고 엄마는 질려서라고 대답했고 그 남자는 믿지 않았다. 엄마가 연락을 끊는 동안 그 남자는 사정없이 망가졌고 도저히 극복을 못한 채 1년을 넘게 혼자 힘들어 하다가 급기야 6개월 전에 자살을 기도했고 그 소식을 들은 엄마는 울면서 달려가 그 남자를 안아주고 용서를 빌었다고.
아내가 남자를 안아준 이후 6개월간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혹은 무슨 일들이 진행중인지 그는 딸에게 차마 묻지 못했고 대신 건설적인 질문을 했다.
내가 어떻게 해 줬음 좋겠니?
/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알고 계시라구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죠.
내가 돌아오기 전에 엄마는 어땠니?
/ 괜찮아 보였어요. 그땐 세상이 상식적이었으니까.
지독한 아이러니였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던 딸이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른 날 그는 딸을 마음에서 지웠다.
저 아이는 딸이 아니다. 그냥 그에게 영역을 침범당한 동물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생물학적 아빠를 몰아낼까 지능적으로 궁리한 앙증맞은 존재였다.
사실 그는 아내에게 남자가 있다는 사실보다 ‘상식적’이라는 단어에 더 상처를 받았다.
몰상식의 화신이 되어버린 그는 그날 밤 아내를 기다리며 뭔가 결단을 했다.
여느 때처럼 술에 적당히 취한 B가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
B도 따라 웃었다.
그는 다소곳히 말을 걸었다.
여보.
/ 응?
당신이 제일 불행했던 적이 언제야?
/ 당신이 죽었을 때.
그럼 당신이 제일 행복했던 적이 언제야?
/ 당신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같이 살 때.
내가 부활하기 직전엔 어땠어?
/ 음.. 뭐 그럭저럭 괜찮았어.
내가 부활한 다음엔 어땠어?
/ .....
대답하기 곤란해?
/ 뭐랄까, 좀 복합적이야.
복합적이라는 건.. 이런저런 감정들이 섞인다는 뜻이겠지?
/ 아마도.. 그렇겠지.
당신 나 사랑하지?
/ 의심할 여지가 없지.
나랑 살 때가 제일 행복했고 내가 죽었을 때가 제일 불행했지만 내가 다시 돌아왔다고 해서 옛날의 행복이 그대로 재탕되지는 않는거지?
/ .. 모르겠어.
A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던 것들을 확인했다.
개운한 심정으로 클로징 멘트를 날렸다.
옛날부터 느낀 거지만 당신 보면 볼수록 괜찮은 여자 같애. 거짓말도 안 하고, 남편 입장 배려할 줄도 알고. 당신이 날 속이지도 않고 날 배려도 했는데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건, 그게 바로 불가피한 상황이란 거겠지.
/ 여보.
응?
/ 누누이 말했지만 난 지금 상태에 조금의 불만도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 다음 주에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
좋지.
그날 밤 A와 B는 가볍게 부둥켜 안고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화기애애하게 마주 앉아 아침을 먹었다.
B가 출근했을 때 A는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인천공항에 가서 북경행 항공권을 편도로 끊었다.
그날 저녁, 그는 북경의 허름한 여관에 두 달치 숙박료를 내고 짐을 푼 뒤 볶음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그는 중국어 학원에 등록을 했고 그로부터 두 달간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두 달 후에 그는 시안행 기차표를 샀고 지도를 샀다.
3일 후에 그는 시안의 PC방에서 기억에 필사적으로 의지해 지역 사진을 검색했다.
다시 이틀 후엔 시닝의 안내소에서 그는 서툰 중국말과 손짓 발짓을 섞어 의사소통을 했다.
다음날 오전 그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버스에 타고 있었다.
창밖으로 광활한 옥수수밭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