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운전석에 올라탄 그는 가장 먼저 룸미러를 들여다봤다.
퀭한 눈에 다크서클, 한 마리의 너구리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피식 웃고는 시동을 걸었다.
시동은 걸었지만 갈 데가 없었다. 잠시 망연한 얼굴로 핸들에 턱을 괴었다.
하지만 어디든 가야 했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일이었다.
지난 10여년 간 그는 언제나 다급했고 전속력으로 악셀을 밟아댔다.
아내는 틈만 나면 그에게 일할 때 여유를 좀 가지라고 충고했다.
여유라니? 그는 농담하지 말라며 웃었다.
따라 웃는 아내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런 아내가 죽었다.
사고였다. 그리고 아내 임종의 순간에도 그는 다른 사람을 태우고 질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너무 바빠서’ 아내의 끝을 보지 못했다.
아내는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제 그 차로 천천히 드라이브나 했음 좋겠다.”
어려운 소원이 아니었는데, 지켜지지 못했다.
1단 기어를 넣고 서서히 악셀을 밟으며 무심코 텅 빈 조수석을 돌아봤다.
마치 공식처럼 눈물이 흘렀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를 호출하는 무전이 울렸다. 그는 무전기를 끄고 악셀을 밟았다. 아주 천천히.
* * * * * * * * * * *
부부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들은 한때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리고 시간은 한때 꽤나 튼튼해 보였던 것들을 서서히 부식시켰다.
그 중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되었는지, 아니면 각자 독립적으로 발원했는지는 모르나 어쨌건 거기엔 시간이라는 총감독의 지휘가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감정과 의지, 남편의 감정과 의지, 그리고 둘 사이의 열정과 신뢰는 서서히 부식되어갔다.
다혈질인 남편은 진부하고 판에 박힌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바람을 피운 것까진 판에 박힌 행위였으나 그 뒤처리는 그렇지 않았다.
남편의 내연녀가 술에 취한 채 찾아와 난동을 부렸을 때 그는 주저없이 내연녀를 때려눕히고, 이어서 아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식탁을 뒤집어 엎고 집기를 부수고는 집을 나가 이틀 뒤에 들어왔다.
그녀가 신선했다고 칭찬하기엔, 남일이 아닌 자기 일이었다.
딱히 복수를 결심하지도 않은 그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을 때 그녀는 얼떨떨했다.
그리고 그 얼떨떨함이 가시기도 전에 남편에게 발각됐다.
다혈질인 남편은 공공장소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아직 죄를 짓기 전인 두 남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얼마 후 한가로운 평일, 그녀와 남편은 집 근처 마트에서 쇼핑을 했다.
바람은 시원했고 공기는 평온했다.
일주일치 식량을 가득 담은 카트를 끌고 주차장을 가로지르면서 그녀는 조용히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다혈질인 남편은 듣는 즉시 굳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카트를 쏟아버리고 빈 카트를 그녀를 향해 쳐들었다.
모서리에 찍히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다.
잠시 후 와장창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눈을 떴다.
카트와 함께 바닥에 뒹구는 남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얼어붙은 듯 서서 쓰러진 남편이 잠시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내 눈을 감고 잠잠해지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뇌졸증? 심장마비? 간질? 아니면... 단순 쇼크?
그녀는 널브러진 남편을 앞에 놓고 이유가 뭘까 궁금해 하는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했는지 근처에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졌다. 그녀의 휴대전화가 얼마 전 남편의 손에 박살이 났다는 걸 잊고 있었다.
남편의 주머니를 뒤졌다. 스마트폰이 아닌 구형 폴더폰이 나왔다. 멍하니 전화기를 들여다보다가 생각난 듯 119를 눌렀다.
다짜고짜 왜 전화했냐고 따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자신이 단축키 119번을 눌렀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침묵 후에 그녀는 남편이 쓰러졌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전 술취해 집에 찾아오지 않았었냐고 물었다.
내가 당신 집에 왜 찾아가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남편과 만나고 헤어진 게 언제였냐고 물었다.
그걸 왜 얘기해야 하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실례했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잠든 듯 누워있는 남편이 참 편안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큰 길가로 나갔다.
택시 대신 구급차 한 대가 멈춰섰다.
“무슨 일입니까?”
“... 남편이 쓰러졌어요.”
초췌한 얼굴의 운전사는 한숨을 쉬더니 그녀와 함께 쓰러진 남편을 뒷좌석에 태웠다.
그녀는 조수석에 탄 채 미동도 없는 남편을 돌아봤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남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이젠 기억마저 흐릿한 먼 옛날 서로를 끊임없이 원했던 시절의 표정이었다. 맞다. 그때는 저런 얼굴로 잠들었었지.
허공에 뜬 카트, 낯선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잠시 부활한 행복의 흔적들이 서로 상관없는 슬라이드 필름처럼 그녀의 눈앞에서 명멸했다.
“구급찬데.. 안에 아무 것도 없네요. ..원래 혼자 다니세요?”
“아뇨. 그냥 바람쐬는 중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무슨 병일까요?”
“전 모르죠. 빨리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뇨. 천천히 가 주세요. 저도 바람 좀 쐬게.”
그 말에 운전사가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는 운전사의 시선을 투명하게 받아냈다.
마치 연극분장을 한 듯한 운전사의 다크서클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럴까요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