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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Apr 05. 2023

길을 걷다가

에세이

처음 보는 여자가 날 똑바로 바라보며 뭐라 말을 걸었다.

난 이어폰을 뺐다.  

    

“교보 문고 가려면 어떡해야 하죠?”     


그때까진 여자한테 아무 관심이 없었다. 교보 문고를 불과 100여m 앞두고 교보 문고를 묻는 서울 시민에 대해서도 관심없었다. 서울 시민이 아닌가보지 뭐.      


“저기 빌딩 보이죠? 교.보.문.고.라고 쓰여 있는.”     


빌딩을 가리키고 여자를 보는데 여자는 빌딩이 아닌 날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럼 이쪽으로 쭉 걸어가면 되나요?”     


라고 물었다. 쭉 걸어가든 쭉 뛰어가든 알아서 하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중앙선 너머 정면 충돌하듯 그렇게 빤히 직통으로 쳐다보는 눈빛은 별로였다. 아무리 이성이라도.      


“그럼 거긴 모든 책들이 다 있나요?”     


이건 거리의 생면부지 토크로서는 아주 부적절하다.

거기다가 여자가 한 말이 아니었다.

난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거기엔 키가 185cm는 됨직한 남자가 서 있었다.

뭐야 이거. 아니 이것들.

난 대답없이 남자를 빤히 쳐다봤고 남자는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러니까 대학교 전공 서적 이런 것도 있나요?”     


'이쪽으로 100m 쭉 걸어가서 니가 직접 물어봐‘

라고 말하기엔 남자가 아직 덜 무례했다.

그냥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공대 전공 서적 좀 구하려구요.”     


여자가 보충설명을 했고 난 비로소 “있어요. 가보세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다시 남자가 질문했다.

이 자식 도대체 뭐지?      


“대학 안 나왔는데요.”     


사실 난 대학을 나왔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아.. 그럼 지금 무슨 일 하세요?”    


어머, 점점.      


“놀아요. 아무 것도 안해요.”     


그건 사실이다.      


“아무 것도 안하실 분 같지는 않은데..”     


이젠 뭐가 남자의 대사고 뭐가 여자의 대산지 의미가 없다.

이들의 정체가 짐작이 갔지만 접근법이 조금 색달랐다.

하지만 조금도 신선하지 않았다.      


“사실 대학을 나오긴 했는데 여기 있는 학교가 아니라..”

“유학을 갔다오셨군요?”

“김일성 종합대학 나왔어요.”     


놀래키고 싶었다.

화들짝은 아니지만 흠칫 정도는 됐다.

그들은 조금 당황한 듯 서로를 마주봤다.

꼭 저럴 땐 서로를 마주보더라.


“저.. 탈북자예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지금 하시는 일이..?”

“놀면서 가끔씩 인터넷 댓글 알바 해요.”

“아....”     


내 장난은 딱 이만큼 혼자만의 재미를 위한 거였고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가야겠다 싶어 돌아서는데 남자가 내 옷깃을 잡았다.      


“혹시 잠깐 시간 있으세요?”     


역시 보통은 아닌 족속이었다. ‘북한’이라는 무게를 순식간에 털어낸 것이다.   

   

“지금 빨리 가야 돼요.“

“어디 가시는 길인데요?”

“얘기했죠. 댓글 달러 간다고.”

“근데 서울말을 참 잘하시네요.”   

  

이들이 내 정체를 알아차렸든 말든 상관 없다. 너무 성의있게 거짓말 할 상황도 아니니까.

난 몸을 돌려 남자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남자는 내 눈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느낀 듯 1/3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남파 훈련 받다가 탈출했죠. 남파 훈련 중에 가장 기본이 표준어 구삽니다. 간첩이 서울에서 평양사투리 쓰고 다니면 되겠습니까?”     


둘 다 말이 없었다. “아. 예..” 도 없었다.      


“마포구 대흥동에 댓글알바 사무실이 있는데요, 지각하면 다시 강제 납북됩니다. 급하니까 이만 가볼께요.”     


내가 가볍게 목례하자 이들도 서둘러 목례를 했고 난 마지막 대사의 개연성을 망가뜨리기 위해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둘은 다시 서로를 마주보지 않았을까?     

나름 익살스런 한때였다. 하지만 별다른 페이소스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조롱하고 싶은 인간들은 내가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안전하게 위치해 있고 무기력한 나는 가끔씩 저런 만만한 부류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세상은 오늘도 아무 문제없이 잘만 굴러간다.     



p.s) 그로부터 얼마 후에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다. 대검찰청 특수부 수사관이란 사람이 내가 금융사기에 연루되었다고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목소리의 기운이 남다르고 복이 많아 보인다고, 조상님이 지켜주시는 것 같다고 했더니 잠시 침묵 뒤에 보이스는 내게 버럭 욕을 했다. 욕먹은 나는 잠시 침묵 뒤에 교보문고 어딨냐고 물어보려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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