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눈이 내려 설렜나요?

두근두근, 산책

by 레인송

하루 종일 눈이 정숙하게 내린다.

9살부터 언니와 나는 주말과 방학이면 시골로 시집간 이모네를 다녔다. 부모님은 주말에도 일을 하셨기에 집에서 보다 할 게 많고 음식 솜씨 좋은 이모네 가는 것이 더 좋았다. 시외버스를 타고 가는 1시간 동안 창밖을 구경하는 재미도 솔솔 했다. 이모가 사는 동네 퇴촌은 사계절이 좋았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지천에 널린 개울이 있었다.


겨울의 시골집은 특별한 분위기를 낸다. 서울 집보다 춥지만 아랫목만큼은 발이 데일 정도로 뜨겁다. 자려고 누우면 이불속은 뜨끈하지만 외풍이 심해 입김이 하얗게 나는 게 좋았다. 동시에 두 개의 공간을 떠안고 자는 기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기는 낡은 방앗간과 점빵이 정겹다. 괜스레 들떠 걸음을 재촉한다. 논과 개울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을 걷다 보면 고전 동화책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시골의 밤은 적막하고 포근하다. 어릴 때부터 귀가 밝고 예민해서 모두 잠이 들었어도 나 홀로 깨어있는 적이 다반사인데 그날도 그랬다. 차가운 공기를 피해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이내 이불을 걷어내고 뒷마당으로 나있는 작은 방문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작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겁도 없이 문고리의 숟가락을 빼고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한참을 숨죽이고 듣자 하니 떨어지는 눈의 소리였다. 뒷마당의 화장실을 비추는 가로등 빛 속으로 낙하하는 눈의 맹렬한 질주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가 9살 무렵인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신비롭던 눈 소리는 다시 듣지 못했다.




눈보라가 치던 11살의 겨울 방학, '작은 아씨들'에 매료된 나는 네 자매를 둘러싼 상황극에 빠져있었다.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던 어느 날, 친구들과 겁도 없이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 뒷동산으로 향했다. 성탄절 아침에 엄마와 네 자매가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을 들고 가난한 이웃에게 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맞서 의기양양 걸어가는 그 순간, 나는 용맹한 자신에게 도취했었다. 종아리의 반이상이 눈에 파묻히고 발을 떼기 무섭게 발자국 위로 다시 눈이 덥혔다. 나뭇가지를 모아 오두막을 만들고 비닐을 주워 지붕을 얹었다. 콧물이 줄줄 흘러 입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눈이 부츠 안까지 파고 들어와 젖어버린 발은 감각이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가 젖은 옷을 벗고 담요가 덮인 아랫목에 냉큼 누워 꽁꽁 언 몸을 녹였다. 머리와 다리에서 김이 올라왔다.


그 후, 눈에 대한 로망이 늘 있었다.

'눈보라가 치면 네 자매 중 가장 용감한 '조'처럼 바깥세상을 향해 나아가리라'

눈만 오면 딸의 유치원, 학교로 찾아가 조퇴를 시키곤 했다. 눈 뿐만이 아니라 비가 오거나 화창한 날에도 아이를 불러내 길 위에 섰다.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엄마를 둔 아이는 또래 누구보다 많은 길을 만났고,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자연을 섬겼다. 중학교 입학과 함께 우리 모녀의 유랑기는 끝이 났지만 좋아하는 사람들, 남편과 함께 여전히 걷고 싶은 곳으로 떠난다.




23살, 은행에서 대기 중에 잡지에 실린 몽돌해변 사진 한 장에 반해 기차 타고 배 타고 거제도에 갔듯, 인스타에서 본 사진 한 장이 나를 애타게 불렀다. 눈이 내리면 당장 달려가기로 마음먹은 곳, 평창 애니 포레. 밤새 눈이 내린 어느 일요일 아침, 단잠에 빠진 가족을 깨워 드디어 길을 나섰다.



1960년대, 정부는 산지 개발의 일원으로 화전 정리사업을 시행했다. 발왕산 자락에 감자밭을 일구던 28 가구의 화전민이 떠난 자리에 1800여 그루의 가문비나무를 심었고 지금의 애니포레가 되었다. 숲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숲은 그지없이 고요하다. 하지만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혼잡한 용평 스키장에 주차를 해야만 한다, 주차장도, 모노레일 정류장도 많은 인파로 붐빈다. 하지만, 낡고 작은 모노레일에 몸을 맡기고 5분이 지나면 동화 속 세상으로 갈 수 있다.


모노레일에서 바라본 풍경




느릿느릿, 작은 모노레일이 도착한 그곳에 꿈꾸던 세상이 펼쳐진다. 빨간 망토를 입은 소녀가 된 것도 같고 계모를 피해 달아난 백설 공주가 된 것도 같다. 누가 되었든 평온함이 가득한 안식처로 들어온 것만 같아 이제 안심이다.

아랫동네는 틀림없이 시끌벅적했는데 이곳은 모든 잡음이 눈 속에 잠겼다.



우리 가족은 조용한 나들이를 즐긴다. 그런 까닭에 입장료를 내고 가는 관광지나 핫 플레이스는 가지 않는다. 해외를 가더라도 박물관과 미술관 말고는 도시 곳곳을 동네 마실 하듯 어슬렁어슬렁 쏘다니고, 제주도에서도 미리 동선을 짜지 않고 발길 닿는 데로 유람하듯 섬을 훑는다. 강릉처럼 도로, 식당, 카페 할 것 없이 서울 못지않게 사람들로 붐비는 여행지는 평일이나 일요일 오후에 방문한다. 일요일 낮 12시쯤 출발하면 이미 반대편 서울방향 도로는 정체가 시작된다. 그 시각에 먼 길을 가서 뭐 하냐 싶지만 바다를 보고, 산책도 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나서는 속초로 건너가 '동아 서점'을(서점의 휴무일이 바뀌기 전까지) 들리고 마지막으로 사우나를 끝으로 짧은 나들이를 마친다. 집에 도착하면 자정 가까운 시간이지만 씻었으니 이 닦고 바로 자면 그만이다. 한여름을 제외하고 일요일 저녁의 하이웨이는 쾌적하다.


애니포레에는 갈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사람이 없다. 눈앞에 낙원을 두고 스키장의 리프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의아하다. 즐거움의 가치는 다르니 그 좋은 곳을 함께 가자고 조를 필요는 없다.


우리 가족만 보기 아까운 비경이다.


모노레일을 타고 가며 찍은 사진을 삿포로라 장난처럼 속여 친구에게 전송했다. 모두 믿는다. 아니, 평창이라고 이실직고하니 가고 싶다며 침을 흘린다. 눈이 오면 앞뒤 가리지 말고 요이, 땅! 하며 떠나 자고 했다. 젊은 세대들은 모르지만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교 체육선생님께서 달리기 출발 라인에 선 선수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요이, 땅!'

'스메끼리' '다마네기'라던가 신발을 사러 가면 '몇 문 신어요?'라고 했던 시절의 말들은 모두 잊었는데 '요이 땅' 만큼은 입에서 떨어져 나가지를 못했다.





눈길을 뚫고 먼 길 떠나는 남편과 딸은 시큰둥했다. 혼잡한 용평 스키장의 주차장 상태가 둘의 심기를 꽤나 불편하게 하고, 수많은 스키어들 사이로 덩그러니 서있는 모노레일을 보고는 비웃기까지 했다. 시속 3km의 느린 속도로 가는 모노레일 안에서 우리 가족은 단 몇 분 만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산책하듯 천천히 눈에 담는 순백의 설원 앞에서 어쩐지 소녀처럼 순진해진다. 감성은 일도 없는 딸도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어릴 때는 눈만 오면 밖에 나가 서너 시간을 눈 속에서 비비고는 했는데, 소녀가 되고 난 후부터 바깥 놀이에 시들하다. 당연한 변화인데 엄마는 서운하다.



비 현실적인 공간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한다.

걷다 보니 오감이 즐겁다. 맑고 청량한 공기와 아름다운 장면들로 눈과 코가 깨끗이 씻기는 기분이다. 때 묻지 않은 바람소리와 눈 밟는 소리가 동심을 자극하고, 숨 쉴 때마다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공기는 달다.

시큰둥하게 따라나선 남편과 딸이 느닷없이 어린아이들이 된다. 눈싸움을 하더니 눈에 파묻혀 눈천사를 만들고 가위, 바위, 보를 외치며 계단 오르기를 한다.

눈은 누구에게나 동심을 부르나 보다.





좁은 산책로를 좋아한다. 좁은 골목과 등산로, 실개천옆 논 사잇길이 그렇다.

자연은 소박해도 그지없이 아름답다.


여름의 숲도 좋다. 새소리가 더해 풍성하다.

키가 큰 가문비나무가 뜨거운 해를 가리고 폭염을 잠재운다. 그러나, 역시 여름보다는 눈 쌓인 이때가 더 근사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설원의 황홀감이 채 가시지 않아 강릉으로 향했다. 급히 숙소를 정하고 하루 묵기로 했다. 다음 날, 남편은 홀로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일터로 갔다. 어쩌면 우리 부부는 노후에 캠핑카를 빌려 전국 팔도를 누비고 다닐런지도 모른다. 소박한 길 위에서 다시금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아름다운 생을 다짐하고 싶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