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출근길이 덜 무거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기보다는, 끌려가지 않는 느낌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회사로 가는 길이 파도처럼 나를 밀어냈다면, 이제는 그냥 길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불을 켜는 일도 익숙해졌다.
불이 켜지면 공간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공간에 들어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은 여전히 비어 있었지만, 더 이상 적막하지는 않았다.
창밖의 고양이들은 그날도 있었다.
이제는 수를 세지 않았다.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그냥 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오늘도 있네.”
그 말을 하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이 싫지 않다는 사실이.
대기발령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무거웠다.
정년퇴직이라는 미래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안은 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무뎌졌다기보다는, 자리를 바꾼 느낌이었다.
나는 이 무인도에서 먹을 만큼 먹었고, 쉴 만큼 쉬었고, 생각할 만큼 생각했다.
크루소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 문 근처에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그의 자리는 이제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어도 괜찮아졌다.
점심시간에 창가에 서서 햇볕을 받았다.
겨울과 봄의 경계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갑자기 따뜻해지지도, 확 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햇볕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인도에 갇힌 게 아니라, 잠시 내려놓은 거였구나.'
조직, 역할, 직함.
그동안 나를 설명하던 것들을 이 섬에 두고, 나는 맨몸으로 서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서웠고, 그래서 고양이와 말하게 되었고, 그래서 크루소를 불러냈는지도 모른다.
그날 오후, 나는 아무 글도 쓰지 않았다.
굳이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써야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믿게 됐으니까.
퇴근길에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질렀다.
이번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잠시 멈춰 서서 나를 올려다봤다.
“나 곧 가.”
말을 하자, 고양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허락처럼 느껴졌다.
무인도는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돌아가기 전에 숨을 고르는 곳이라는 걸 나는 이곳에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