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수평선 너머의 육지를 바라봤다.
또 다른 나의 존재를 받아들여서인지, 처음엔 뿌옇게만 보이던 형체가 이제는 제법 또렷했다.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또 다른 내가 말했다.
“죽는다는 뜻입니까?”
“죽음이라… 이곳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단어입니다.”
“그럼 이곳에서는 죽지 않는다는 겁니까?”
“이곳은 무인도입니다. 죽음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죠.”
“그럼 내가 여기 계속 있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건가요?”
“산다는 표현보다는 존재한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그럼 나는 지금 존재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사라진다는 뜻입니까?”
“네.”
대답은 짧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조금씩 무뎌지고, 그러다 사라질 겁니다.”
또 다른 나는 마치 이미 정해진 답을 설명하듯 말했다.
그 태도가 조금 거북했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탈출 방법을 고민해 봤어요.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죠.”
“이곳에 한 번 들어온 이상 탈출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게 뭔데요?”
또 다른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 무뎌지는 시간을 견디는 것.”
“언제까지 견뎌야 하죠?”
“그건 당신이 가장 잘 알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남아 있는 물과 음식을 살폈다.
“이 정도면 두 달은 버티겠네요.”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문득 시간이 멈춘다는 버뮤다 삼각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혹시 여기가 버뮤다 삼각지 같은 곳인가요?”
“하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소설을 쓰는 사람답네요. 그런 이야기를 진짜로 믿는 겁니까?”
웃음소리는 컸지만 이상하게도 조롱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무인도에 표류했고, 눈앞에는 또 다른 내가 나타났으며, 나는 존재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소설 쓰기를 멈추고 외투를 걸친 채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건물 밖으로 잠시 나가 보기로 했다.
이 시간에 사무실을 벗어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햇볕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건물 모퉁이를 도는 순간 길고양이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햇볕을 쬐고 있었다.
털 색깔이 비슷하고 크고 작은 고양이들이 섞여 있는 걸 보니 가족처럼 보였다.
큰 고양이는 앞발을 모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작은 고양이들은 앞발을 들어 서로의 얼굴을 툭툭 치며 놀았다.
마치 마네키네코(일본 장식품, 행운고양이)처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큰 고양이가 짧게 울었다.
그러자 작은 고양이들은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날이 더 풀리면 이렇게 잠깐씩이라도 밖으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다음 이야기>
예상보다 시간이 더 지체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속도를 내보기로 했다.
몸을 빠르게 움직이자 금세 숨이 가빠졌다.
오른쪽 무릎에서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을 만했다.
심장 박동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