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殘像)

나름 소중한 기억의 파편(破片)

by 가을하늘 추천
'잔상(殘像)': 외부의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감각 경험이 지속되어 나타나는 상. 촛불을 한참 바라본 뒤에 눈을 감아도 그 촛불의 상이 나타나는 현상 따위이다. 표준국어대사전(2025.7)


잔상 1


동구

신암4동

새마을 오거리

우리 집은 단독주택

지하실 쿰쿰한 곰팡내

빛바랜 미제 검정 야구 배트(bat)

왜 하필 우리 집이었던 곳에서 셋방살이를

부엌 곤로(こんろ)에서 풍기던 역한 백등유 냄새

끼니때마다 눌은밥이 싫다고는 못하고 애꿎은 설탕만 잔뜩 넣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항상 텅 빈 방 안

한쪽 구석 교자상 위에 놓여있던 찻잔 두 개

빨간 립스틱 자국과 재떨이에 비벼 끈 담배꽁초 몇 개

하얀 찻잔 안에 얼룩져 있던 갈색 자국과 커피 프리마 냄새

새마을 오거리 셋방 앞 골목에 버려져 있던 노란 바나나껍질 냄새


초등학교 입학식 때 맨 앞줄 있던 눈이 큰 아이의 이름도 못 물어본 채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도망치듯 제주도로 이사를 갔다.


잔상 2


어수선했던 제주도 이삿날

군용기(軍用機)의 소음(騷音)과 진동(振動)

차를 타고 한라산 1100 도로를 지나갈 때도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와 비슷하게 고막이 멍멍했다.


태풍경보로

일찍 끝나버린 수업

하굣길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춤추듯 흔들리던 청보리밭을 끼고

초등학교 짝꿍과 손잡고 뛰어갔던 돌담길

빗물에 둥둥 떠다니던 가축들의 분변(糞便)과

보리밥과 마늘종 장아찌만 싸주던 양은도시락이 싫었다.


미친 순자 굴

우박 쏟아지던 날

항상 머리를 땋아 다니고

쌍꺼풀진 눈이 유난히 크고 예쁜

웃을 때마다 덧니가 살짝 보여 귀여웠던

같은 동네 사는 동갑내기 여자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첫사랑이었다.


잔상 3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미술반에 들어갔다 다시 만난

초등학교 동창인 부잣집 쌍둥이 형제들


생전 처음 본 이젤(easel) 앞에 앉아

겉이 유광 검정인 하얀 팔레트(palette) 안을 가득 채운

색색의 수채화(水彩畫) 물감들과 함께

비싸 보이는 날렵하고 매끈한 붓을 쥐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내 미술 도구들이란 게

아직 초등학생티를 못 벗은

온갖 싸구려투성이뿐이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잠깐 다녀왔는데

군용(軍用) 흰색 면 팬티(panties)에 찌들어있던

누런 오줌 자국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 서러웠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