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31일 목요일
이번 달도 무사히 4회를 찍었다. 이로써 '성인취미미술' 나불갤러리 방문은 총 8회가 되었다. 그동안 (나무 그리기 연습한 거 빼고) 파브리아노 토천(Torchon) 스케치북 4절지에 풍경 수채화 1장, 8절지에 4장을 그렸다. 이제 아르쉬(Arches)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기대감보단 걱정이 앞선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그동안 목요일마다 퇴근 후 미술학원에 가는 게 나름 즐거웠다. 학원에서도 2시간 동안 그리기에 집중했다. 근데 오늘은 대충 그리다 오자는 마음이 더 컸다. 벌써 싫증이 난 건가? (아니면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니까 슬슬 포기하고 싶어진 건가?)
막막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스케치를 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평소처럼 대충 쓱쓱 그리면 안 될 것 같다. 과감하게 선 하나 그려낼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이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선생님이 먼저 자리를 잡고는 '참고선'을 거침없이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평선과 배, 종탑의 위치를 잡는다. 그다음은 대략적인 건물의 높이를 설정하고, 해변과 바위들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을 정한다. 이 그림에선 배와 종탑이 주인공이므로 비율을 고려해서 대략적인 형태와 크기를 그려준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이래서 선생님이 필요하구나' 생각했다. 선생님이 그려준 '참고선'의 도움으로 대충 스케치를 마무리했다.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은 이탈리아 제노바 근교 소도시인 '카몰리(Camogli)' 해변 풍경이다.
아직 1시간이나 남았는데, 그 몹쓸 조급함이 또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스케치 같은 거 대강 끝내고 바로 채색을 들어가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평소답지 않게 다른 수강생을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을 불렀다. 내가 한 스케치를 한 번 쓱 보더니 바로 지우개와 샤프를 들고 이젤 앞에 앉았다.
좀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은 배와 종탑이다. 배는 형태를 정확하게 잡아줘야 균형감 있게 보인다. 휘어진 곡선과 선체의 두께를 표현해야 입체감이 살아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스케치한 선들이 너무 지지분하게 겹쳐 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채색할 때 색이 깨끗하게 나오지 않는다. 건물들도 너무 크기가 일정해서 원금감을 깨뜨린다. 가까이 올 수록 건물들의 크기는 조금씩 커져야 한다. (그래서 창문은 그리지 말라고 했던 건데, 나는 또 건성으로 듣고 그려버렸다) 해변과 바위도 너무 대충 그렸다. 채색을 위해서라도 스케치는 꼭 필요한 선으로 사물의 형태를 정확하게 그려 넣어야 한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고려해서 그림자도 정확해야 한다. (그동안 스케치를 하지 않고 대충 그렸던 방식을 이제는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케치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진 않았지만, (아직 오른쪽 건물들을 다 고치지 못했다) 남은 시간에 하늘 부분만 채색해 보라고 했다. 처음으로 아르쉬지에 물을 먹이고 물감을 묻힌 붓으로 색칠을 해보았다. 그전에 쓰던 스케치북 종이와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근데 문제는 한 번 칠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또 여러 번 덧칠하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연하게 칠해서 다음 시간에 같이 고쳐보자고 나를 위로했다)
'힘든 시간을 이겨낼 때,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카카오페이 증권)
과연 내가 강해질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P.S. 지우개도 스케치용이 따로 있다?!
2012년 원주 시내 화방에서 사장님이 서비스로 넣어준 13년 된 지우개를 아직도 쓰고 있다. 그동안 지우개는 그냥 잘 지워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케치용 지우개는 잘 지워지기도 해야 하지만, 지우면서 생기는 지우개 똥(?)이 떡(?)처럼 뭉쳐져야 종이 위에 달라붙지 않고 바닥으로 잘 떨어져서 쓰기 편하다. 지우개를 쓸 때마다 지우개 똥이 종이 위에 붙어버리면 일일이 제거해야 해서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 (화가에게 시간은 돈이라고 선생님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