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회사에서 할 일이 많았던가? 12월이 됐는데 휴가가 3개나 남아버렸다.
그래서 무턱대로 금요일에 휴가를 냈다.
그런데, 금요일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온다. 뭔 놈에 겨울비가 이리 길고 묵직하게 오는지. 3일 내내 하늘 구멍 한번 낸 적 없이 촘촘하게 비를 뿌려댔다.
아이들 등교시켰고, 집도 청소기로 한 번, 걸레로 한 번 싹 훑었겠다. 이제 휴가를 낸 이유가 됨직한 무언가를 해야 했다.
나는 J다. 분명한 목적과 방향에 따른 계획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비도 오는데 도서관 가서 책이나 왕창 읽을까 하다가 아차 한다. 매주 금요일이 휴관일이란 사실이 비 오는 날 책 속에 파묻혀 심취해 있을 내 머릿속 상상을 단칼에 빠개버렸다.
침통한 표정으로 TV 채널을 이리저리 뒤져봐도 재미난 게 보이지 않자 나는 리모컨을 든 체 집안 구석구석 레이저를 발사하며 목표물 발견을 위한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때 베란다 너머 붙박이장에서 시선이 멈춰 섰다.
아.. 그거다! 한복 만들기!
완전 전통적인 한복은 아니고 평소에 입을 수 있도록 개조된 철릭원피스가 만들어 보고 싶어 지난여름에 처음 으로 만들기를 시도했었더랬다. 그런데 확실히 첫 술엔 배부를 리가 없다. 도안이 너무 타이트한 사이즈였고, 거기다 여름소재라 탄력이라곤 없어 팔을 끼워 넣는 것 만도 힘들었고, 팔을 움직이기에도 더없이 불편했다. 말 그대로 인형옷이다 인형옷.
흠... 그래 그럼 겨울소재로 다시 한번 도전해 보자! 패턴도 다른 걸 구입하고, 소재도 탄성이 있는 코듀로이로 계획하고 천과 패턴을 구입하고는 일이 생겨 차일피일 미루던 녀석이 저 베란다 보관함에 잠들어 있던 것이다.
오늘은 저거다!
도안을 먼저 펼쳤다. 양이 많다. 뭔 소리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럴 때는 무조건 먼저 부딪혀 본다.
하다 틀리면 다시 하면 된다. 그런게 다 도움이 되었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완벽해야 할 필요가 없다.
도안을 사이즈에 맞춰 먼저 자른다. 확실히 상체에 패턴이며 라인이 복잡하다. 다 자르고 나면 이제 원단을 뒤집어 펼쳐서 잘린 패턴을 위에 올려 초크로 그린다. 이때 주의 할 것은 원단의 방향이다. 코듀로이는 세로줄이 있는데 거의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향하도록 옷을 만들고 허리에 들어가는 띠만 가로줄로 만든다. 그래야 이쁘고 세탁 후에도 잘 틀어지지 않는 것 같다.
원단을 그리고 자르는 작업이 옷 좀 만들어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가장 어렵다. 평평하고 딱딱한 종이가 부드럽고 유연한 천으로 옮겨지는 일이니 그럴 법도 하다. 콧구멍에 먼지가 계속 들어가 재채기를 연발하며, 청소한 집이 무색해질 만큼 천조각이 거실을 뒤덮고 나면 어찌어찌 재단이 완성된다.
이제 미싱으로 드르륵 박기만 하면 된다.
으~~ 으~~
미싱작업이 젤로 재밌다. 미싱이 윗실 아랫실 엮어가며 어찌나 꼼꼼스럽게 박아주는지. 요 녀석은 우리 집에 와서 바늘이 몇 번이나 부러질 만큼 고생하고, 흰 실 검은실 먼지구덩이를 뒤집어쓰며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자신을 보며 한숨이 날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그저 이쁘고 고마울 따름이다.
아침 10부터 시작된 한복 만들기 프로젝트는 저녁 10시 40분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손바늘로 안감 시침질을 끝내고 나서야 온몸 여기저기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허리도 끊어질 것 같고, 목부터 어깨까지 내려앉는 것 같다. 그래도 마음만은 너무너무 뿌듯하다.
여기저기 실뭉치가 묻은 한복을 대충 털어내고 긴 거울 앞에 한복을 입고 서본다.
음.. 좋다. 따습고, 편하고, 어깨며 허리 불편한 곳도 없다.
한껏 뽐내며 둘째 앞에 섰다.
엄마 어때? 옷 이쁘지?
유튜브를 보고 있던 둘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참을 위아래를 훑더니.
[이거 입고 회사에 가고 뭐 그럴 건 아니지?]
흠...
게임 중인 첫째는 이어폰을 오른쪽만 재끼고 쳐다보더니
[어... 큰 칼만 차만 완전 호위무산데.]
그러고는 다시 이어폰을 고정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흠흠...
그래.. 니들이 무슨 패션을 알겠니... 교복 셔츠도 조끼 바깥으로 반만 빼서 입고 다니고, 여차하면 흰티에 롱패딩만 걸치고 다니는 상남자 중딩님들께서...
꼬박 12시간의 노고를 평가절하 시키는 요 녀석들을 마음속으로 살짝 비웃어 주고, 새로 만든옷은 세탁기에 돌리고 거실 정리를 말끔히 마쳤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