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바짓단이 참 길다.
오버핏 팬츠가 유행이니 또 입어주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길이가 기니 슬쩍 접기만 했을 때 온 동네 흙을 다 쓸고 다니는 범 국가적 청소 작업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들러붙어 있는 나무 조각이며 마른 잔디부스러기, 풀풀 날리는 흙먼지로 확인하고 나서야 미뤄뒀던 날을 한번 잡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쉬는 날 집청소를 끝내고 베란다 테이블에 앉아 붙박이 장을 톡 밀어 연다.
그곳엔 쓰다만 헝겊조각, 때어 놓은 사계절 천, 색색의 실패, 똑딱이 도구, 수세미실, 코바늘. 그리고 미싱이 있다. 나만의 놀이터. 죽어가던 천조각이 다시 생명을 얻어 가는 리폼의 성지.
일단 길이가 긴 코듀로이 바지 2개와 최근에 산 꽃무늬 폴리 원피스를 테이블에 올린다. 바짓단은 잘라서 말아 박으면 되고, 원피스는 넥라인에 리본을 묶어 길게 늘어뜨리는 스타일인데. 치렁치렁한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리본을 잘라내고 차이나넥 형식으로 변경할 심산이다.
길이를 대충 확인하고 도톰한 검은색 바지부터 재단가위로 밑단을 슥슥 잘라낸다. 그리곤 1cm 간격으로 접어 드르륵 박기 시작한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미싱을 돌리고 있으면 잡생각이 싹 사라진다. 손이 바늘에 다칠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것도 있지만 천이 어느 한 곳 울지는 않을지 쫙 펴주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당겨줘야 하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릴 여력이 없다. 실제로 회사 후배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받았던 주말에는 13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침대 커버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미싱을 하며 초고도 집중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요소는 따로 있다. 바로 요 일정하고 규칙적이며 확실한 박음질 소리. 바늘이 천을 뚫고, 아랫실과 윗실을 엮고 나서 앞으로 나아가며 발생하는 효과음. 앞으로 나아간다는 확신과 박음질의 결과를 함께 보여주는 당찬 행진음.
그래서 미싱은 참 매력이 있다. 딱 부러지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그런 박음질 소리에 확실하게 딱 부러지는 소리가 더해졌다. 우지끈!
헐.
두꺼운 코듀로이 팬츠를 두 번 접은 데다 세로로 마감된 봉제선까지 만나는 부분에서 그만 최저가 찬스로 구입한 병약한 우리 집 미싱이가 드디어 두 손을 들고 파업을 선언해 버렸다. 이제 얇은 천만 박을게 달래보고, 나사를 풀어 살살 먼지를 털어내며 회유해 봤지만, 녀석의 파업은 강경했다. 당찬 녀석도 지치긴 하겠지. 내가 너무 써먹었어...
하... 네이버 검색으로 알아낸 읍내 브라더 미싱 AS 센터에서도 코끝으로 돋보기를 내리고 바둑을 두시던 할아버지 기사님이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눈도장만 찍더니 축이 휘었다며 바로 포기해 버리셨다.
바지단을 이미 잘랐는데... 무거운 미싱을 이고 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일단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겠다며 다시 심기일전해 바늘과 실, 쪽가위를 늘어놓고 바느질을 시작했다.
갈색실 길게~ 잘라 준비하고 바짓단 시침핀으로 고정하며 한 땀 한 땀 인간 미싱기처럼 바지단 두 개를 줄이고, 원피스 셔츠 깃도 마무리했다. 뭐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되니까. 일단 서울은 갔다.
나에게 맞춘 완벽하지 않은 리폼 완성이다. 바늘땀도 일정하지 않고, 바짓단도 왼쪽 오른쪽이 조금 차이가 나는 리폼. 내가 완벽하지 않아서일까 요렇게 조금 모자란 듯한 녀석들이 나는 정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