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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Mar 21. 2024

고관여층 책임론과 겁쟁이들의 나락

최근에 ≪영성 없는 진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싸가지 없는 진보’류의 책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하고 봤더니 필자가 김상봉 교수였다. 교수로서도 유명하지만 필자로서도 추천받는 분이니 내용은 좋을 것 같다. 그렇긴 해도 나중에나 읽을 듯하군.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비슷해 보이는 책들이 범람하기 때문에 피로한 건 어쩔 수 없다.     


요새 정치 고관여층의 책임을 다룬 책들이 꽤 보인다. 꽤 유명한 필자나 유명한 출판사들의 작품이다. (나와 몇몇 사람들의 불호를 떠나) 강준만 교수야 이 분야에서는 잔뼈가 굵고, ‘팬덤정치’ 혹은 ‘민주주의’라고 치면 (대체 왜 같은 말로 통용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치 팬덤, 진영주의자, 이념주의자가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홍보 문구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범인 찾기 대단한걸. 보고 있노라면 씁쓸해진다. 설익은 ‘86 책임론’처럼 어설픈 문제의식과 일반화가 보일 뿐인데, 비슷한 기획들이 계속되는 걸 보면 팔아먹기 좋은 소재가 하나 발굴된 것 같다. 부디 ≪영성 없는 진보≫가 다른 결을 보여주길 바랄 뿐.     


정치 고관여층에게 비판을 집중하는 기획은 구성원 대다수가 자신을 정치적 중립파라 자처하는 탈정치적 사회 분위기와도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최근의 분위기를 꽤 잘 보여주는 것은 유튜브 피식대학의 <나락퀴즈쇼>다. 퀴즈쇼 컨셉으로 문제에 대답하기 어려운 보기만 주고 하나를 고르라고 말하며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는 게 웃음 코드다. 이 난감함을 만드는 주요 기제 중 하나는 정치다. “잼버리 사태는 누구 잘못인가?”에서 ‘전 정부’, ‘현 정부’가 나오는 식이다. 첨예한 정치적 논쟁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퀴즈쇼 도전자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래도 이 정치적 논쟁이 비윤리적인 것도, 탈법적인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렇게 몸을 사리는지, 저 상황에 엄청나게 공감이 간다는 듯이 폭소하는 반응이 개인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다만 ‘잼버리’라면 블랙 유머로 언급할 만했다.     


하지만 “다음 중 가장 싫어하는 운동을 고르시오.”라는 문제를 내고, 3.1 운동, 흑인 민권 운동, 노동자 인권 운동, 여성 운동을 제시했을 때는 욕설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투쟁이 누군가의 웃음을 끌어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니까. ‘가상 싫어하는 운동’ 문제를 두고 꽤 적지 않은 수는 <나락퀴즈쇼>에 분개하며 발길을 끊었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그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본다. 개중 다수는 ‘정치병자’들의 불편함일 뿐이라고 비판자들을 매도한다. 특정한 정파 색을 보이지 않는 순수하고 중립적인 사람들이자, 소모적인 논쟁에 매몰되지 않는 지성에다 유머를 갖춘 ‘건전 시민’의 입장에 서서.      


좋은 건 너네가 다 해 먹어라.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는데, 하고 소리쳐 주고 싶은 심정이다. 기성 정당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기성 정당 중 하나에 당적을 정하고, 특정 정당과 정당 후보를 열렬히 지지하지 않는다고 윤리적으로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정당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한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의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 <나락퀴즈쇼>의 “다음 중 싫어하는 운동을 고르시오.”는 정당 정치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정파와 상관없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질문으로, 정치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그 가치들을 수호해야 하며,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하라는 헛소리를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소위 중립파는 사회적 가치와 정의도 정파의 문제 인양 왜곡해서 인지한다.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의 프레임에 걸려든 결과라 하더라도, 그 극단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게 민주 시민의 의무이다. 자기들 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이들에게 정당하게 분노하는 것도.)           


정파의 문제가 되는 순간,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소란’과 ‘싸움’이 일어나기에, 중립파는 가치, 정의와 관련된 일에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투쟁하더라도 퀴즈쇼에서처럼 모른 체하거나 비웃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건전한 시민이며 ‘정치병자’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 사이에 사회에는 계속해서 불의한 일들이 일어나고, 불의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정파적인 사람들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R&D 연구 예산이 삭감된 것을 항의하여 퇴장당한 이는 정의당 당원이고, 채 상병 사망사건 조사에 소극적인 대통령에게 목소리를 높인 사람은 국민의힘 당원이다. 대체 순수한 무당파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가 아파하거나 죽는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까. 하다못해 그 당원들의 항의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목소리를 함께 할 수 없는 거라는 입장이라도 표하고 있나? 그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아주 가끔 여론조사에서 R&D나 채 상병 사건,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설문에 대답을 하기도 하지만 거기까지며, 부당함을 느끼더라도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나쁘다는 ‘쿨병’ 가득한 시선을 유지한다. 때로 ‘이쪽도 저쪽도 문제’라는 식의 코미디나 밈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 힘든 시간을 해학적으로 이겨나간다 착각하겠지. 현실은 ‘1번이냐, 2번이냐’를 가지고도 벌벌 거리는 애어른들인 주제에.      


SNL 모텔 개그는 찾아보면서 정당 얘기는 불편해하는 애어른들의 관심사는 정치와도 무관하고 정의와도 무관한 일에 맞춰진다. 손흥민과 이강인의 다툼, 류준열이 과연 혜리를 두고 ‘환승연애’를 했는지의 여부, 안산의 ‘매국노’ 발언, 황대헌과 박지원의 잦은 충돌 사고... 연예나 스포츠 이슈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높은 한국이라지만, 사이버불링 이상의 과열 양상을 보이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기저에는 다시는 정치나 정의 이슈로 돌아갈 수 없는 중립파의 난감함이 자리한다. 극우 포퓰리즘 이슈에 휩쓸려 대표자를 뽑아놓으니 다 망한 듯하고, 그렇다고 정치적인 책임과 논쟁은 지기 싫으니 죽어라 연예인, 운동선수들의 가십이나 쫓는 것이다. 그런 얄팍한 가십이나 찾을 시간에 ‘채 상병 사건’이나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나 관심을 가지라는 말까지도 할 힘이 나지 않는다. 단지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자기 자신이나 돌아보고, 특정한 사람을 내쫓으니 마니 하면서 정의 구현하는 법관 코스프레 대신 직장이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괴롭힘에나 목소리를 내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아니라면 나는 그들이 이름 그대로 ‘나락’에 갔으면 좋겠다. 어른들이라면 아파트 값이 떨어졌으면 좋겠고 내 또래 청년들이라면 언더도그마 운운하면서도 틈틈이 부은 ‘청년도약계좌’ 잔고가 바닥나기를 바란다. 여행 가려고 만든 목돈이 모종의 이유로 날아갔으면 하며, 연인이 있다면 파국적인 이별이 성사되길 바란다. 사람은 사람을 바꾸기 어렵지만, 시련은 때때로 사람을 강하게 하고, 용감하게 만들기에.


*겁쟁이들의 나락... 마음에 들지 않아 수정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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