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2022년 여름을 뺏어간 소녀들
SM의 아버지 유영진? 어머니 켄지? 그렇다면 우리가 좋아했던 SM의 정체성은 바로 민희진이었다. 정체성의 이적이라니! 그것도 (방시혁PD님의) 하이브로! 사실 '민희진이 없는 SM'보다 더 새로웠던 건 '민희진이 있는 하이브'였다. 하이브와 민희진? 심지어 새로운 레이블을 만든다고?
하이브로 이적을 하신 민희진 디렉터님의 새로운 걸그룹이 론칭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가장 궁금했던 건 노래도, 멤버들의 얼굴도, 국적도 아닌 '그룹명'이었다. 걸그룹 역사 근 30년. 사실 나올만한 걸그룹명은 다 나온 이 케이팝 판에 어떤 그룹명으로 또 덕후들의 심장을 뛰게 만드시려나.
그렇게 22년 8월 (갑자기) 뉴진스는 유튜브를 통해 베일을 벗었다. 뉴진스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청바지(jeans)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유전자(genes)? 아니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고!? 그룹명을 보고 갸우뚱한 것도 아주 아주 잠시. 냅다 공개된 뉴진스의 어텐션 뮤직비디오는 그들이 왜 뉴진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대중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베이직한 아이템이라 단정해 보이기도 하고 스타일에 따라 힙해 보이기도 하는 청바지.
매일 찾게 되고 언제 입어도 질리지 않는 진 (Jean)처럼 시대의 아이콘이 되겠다는 포부가 허황되어 보이지 않는 신선한 데뷔였다.
앞서 말했듯 민희진 디렉터는 TVn 유퀴즈에 나와 정.반.합과 관련된 자신의 브랜딩 철학을 설명했다. 정.반.합이라니. 소녀시대의 반(反)으로 에프엑스가 그리고 그다음 장단점을 합쳐 탄생한 레드벨벳까지. 이 얼마나 촘촘하게 짜인, 계산적이고 철저한 브랜딩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적 후 민희진 디렉터님이 처음 선보이는 그룹이니, 뉴진스를 만들기 위해 전문가들의 엄청난 피땀 눈물이 투자되었을 사실은 업계 사람이 아닌 일개 덕후인 나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굉장히 아이러니한 것은 수많은 사전 단계를 걸쳐 탄생했음이 분명한 그룹이 그 어떤 팀보다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요령이 없는 것 같은 미칠듯한 자연스러움.
뉴진스는 분명 수많은 연습생들 가운데 추려진 최정예 요원들일 것이 분명한데, 다섯 명의 생머리가 어찌 이리 편안하게 예쁠 수가 있을까. 수많은 전문가들의 회의와 시행착오 끝에 완벽해진 뉴진스는 어느 팀보다도 가장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는데도 가장 예뻐 보이니 대중의 시선을 끄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뮤비 티저도 예고도 콘셉트 포토 사진도 없이 공개된 어텐션 Attention 뮤직비디오. 그렇지 이게 허를 찌르는 게 민희진식 정반합이지. 최근 새로운 걸그룹 데뷔 방법을 생각해보자. 각 멤버별 티저 사진이나 영상 공개, 트랙리스트 공개, 음원 하이라이트 미리 보기 등 감질나게, 안달 나게, 팀의 다음 스텝을 추측할 만큼만 살짝 공개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뉴진스는 달랐다.
갑자기 공개된 3분의 뮤직비디오.
그렇게 이름도 나이도 얼굴 구별도 알아내지 못한 채, 우리는 다섯 소녀들에게 2022년 여름을 뺏겨버렸다.
비주얼, 컨셉, 세계관, 브랜딩. (성공하려면 챙길 것도 많아진 케이팝 시장...) 아무튼 K-POP 세계관에서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지만, 아이돌의 본질은 그래도 가수다.
그러니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건 노래다.
최근 케이팝 시장을 생각해보자. 도파민이 팡팡 터지면서 중독성을 높이는 노래들이 많았다. 귀에 착-하고 감기는 빠르고 강렬한 비트의 항연. 특히 걸그룹 보이그룹 상관없이 후반부에는 랩 담당 멤버들의 빠른 랩이 등장하는 노래들이 많았다. 뉴진스 노래의 차별점이라면, 귀가 편안하다는 것. 노래와 비주얼의 오차가 어떤 그룹보다도 적다는 것. 예명을 쓰지 않고 모두가 본명을 쓴다는 점도, 아무도 염색을 하지 않은 기본값의 머리로 등장한 점도. 담백한 도화지에 뿌려지는 디테일한 스파클링들은 뉴진스를 완성시켰다.
솔직히 말하면 영어는 더 이상 외국어의 영역은 아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는 더 그렇다. 사실 그룹명(New jeans) 부터가 영어지 않은가. 한국에서 1N년간 해온 영어공부 실력으로 미국에도 잠깐 살다왔지만, 사실 처음 쿠키를 듣고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참 통번역가님의 유튜브를 통해 가사 논란이 있을 때 문제가 되는 부분을 찾아서 읽어봤다. 영어권에서 나고 자라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노래를 듣고 선정적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논리가 빈약하지 않다면 다음 앨범에서는 분명히 비슷한 결의 논란이 있어서는 안 된다. 뉴진스가 밀고 나온 깨끗하고 자연스러운 예쁨. 선정성 논란과는 저 멀리 대척점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민희진 대표는 뉴진스가 보여줄 다음 스텝은 엉뚱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엉뚱하다라.
난 이 단어에 왜 또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케이팝 덕후뿐만 아니라, 브랜딩 마케터와 여러 기획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이 된 뉴진스.
그들의 다음 행보가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