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져도 괜찮아, 이겨내면 되니까. 르세라핌의 이야기
anti- fragile
걸크러쉬라는 하나의 장르가 K-POP 내에서 걸그룹이라면 한 번쯤은 거쳐 가야 하는 자연스럽고도 필수적인 컨셉으로 소비된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전까지는 우리가 제일 쎄, 우린 실패하지 않아 라는 메세지를 말하는 걸크러쉬였다면 2022년의 걸크러쉬는 조금 달랐다. 한마디로 말하면 안티-프라즐. 우리는 실패해도, 깨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서면 되니까- 라는 조금 더 깊이 있고 다차원적인 메세지로 진화하였다. (변화보다는 진화 쪽에 더 가깝지 않은가? ^^,,)
스타성, 외모, 실력, 덕후력까지 아이돌의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던 이른바 '육각형 멤버'는 4세대 이전까지는 한 그룹에서 한두 명을 찾기도 어려웠다. 대부분 그룹 내에 한두 명 정도 존재하는 육각형 멤버가 모두의 최애/차애로 자리매김하면서 하나의 그룹을 (멱살 잡고) 이끌어 가는 형태가 판이했다. 그러나 최근 4세대 여자아이돌을 보고 있자면 분명 다른 지점들이 눈에 띈다.
아이브 / 뉴진스 / 엔믹스 / 있지 등 4세대 여자아이돌을 생각해보면, 뭐 하나 빠지는 멤버가 없다!
평균 비주얼, 평균 실력, 평균 덕후력.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평균적인 아이돌의 능력치가 분명히 높아졌다.
그러니 꼭 케이팝 덕후가 아닌 일반 대중들도 신곡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찾아 듣게 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2022년은 역대급으로 많은 여자 그룹이 오랜 시간 차트를 장악했던 한 해가 되었다. 거의 한 달마다 4세대 여자아이들이 신곡을 발표하며 많은 K-POP 덕후들, 나아가 머글들의 심장까지 퍽퍽ㄱ.. 때리고 있다.
(어느 걸그룹의 노래를 들어도 평균 이상이니^^;)
그 중에서도 나는 올해 르세라핌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방탄소년단 여동생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데뷔한 르세라핌. 2022년 올해 상반기 피어레스(FEARLESS) 라는 데뷔곡으로 화려하게, 어쩌면 소란스럽게 데뷔했다. 데뷔하자마자 전 멤버인 김가람 사태가 있었고, 그 상황과 피어레스의 당당한 가사가 절묘하게 어긋나면서 오히려 그녀들이 대중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반감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짜 르세라핌의 시작은 피어레스 앨범 이후의 행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이브가 유튜브에서 공개한 르세라핌의 데뷔 준비 영상. 한국인들은 대체로 치열하고- 의지 있으며- 간절하기 까지한 젊은 청춘들의 팬이 되는 일에 취약하다. ^^; 절실한 마음은 대부분 진실하다고 믿기 때문이고, 아이돌의 진실한 태도는 열성적인 팬들을 얻는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다. 아이즈원 출신이었던 김채원과 사쿠라, 프로듀스 101 출신의 허윤진, 소스 뮤직 연습생이었던 홍은채, 아이돌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던 발레리나 카즈하까지. 각자가 밟고 서 있는 서사들을 확인한 후에야, 데뷔하기 전까지 지나쳐온 수많은 퀘스트를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그녀들이 전하는 메세지가 곧이곧대로, 혹은 더 입체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왔다.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토슈즈'
어떤 면에서 하이브는 뭘 좀 알고 있는 회사가 맞다. 방탄소년단의 가장 깊은 순간을 뽑는다면 그것은 화양연화이며, 그 작품은 한 그룹의 서사가 얼마나 비틀거리면서도 견고하고 단단하게 빚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내 기준에는) 걸작이다. 그 이후로 현 하이브, 구 빅히트는 젊고 치열한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서사의 힘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르세라핌은 각자의 서사와 어울리는 완벽한 곡을 찾았고, 그 곡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한 연습량과 퍼포먼스가 완벽하게 뒤받쳐주었다.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것은 르세라핌이 보여주고자 하는 차갑고도 치열한 열정, 우아한 땀방울 같은 것들을 녹일 수 있는 곡들을 앞으로 만나는 것이다. 안티 프라즐보다 더 르세라핌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새로운 단어가 나올 수 있을까? 분명히 그러할 것이며, 또 그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