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삭제 Jun 22. 2023

네 남매의 이름.

'지수'라는 나의 이름에 깊은 뜻을 중학교가 들어가고 서야 알게 되었다.


이름을 한자로 써서 시험을 보던 한문시간에 자신의 이름의 한자를 알아 오라고 했다. 나의 이름에 들어가는 '지'자가 나는 당연히 지(志)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빠가 적어준 한자는 영지지(芝)였다. '수'는 당연히 빼어날 수(秀)를 썼다.


고로 내 이름의 한문 뜻을 해석하자면 영지의 빼어남이 되는 것이다. 13년 동안 숨겨왔던 나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 충격이었다. 내 이름에 영지버섯이 들어가다니, 버섯이라니, 한동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비밀을 알아야만 했다. 왜 먹는 버섯을 이름에 넣어놨는지. 엄마에게 따지듯 묻자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들 나라고 잔집할배가 지준거 아이가, 근디 그기 영지지드나?"


이런 젠장, 또 그놈의 아들이었다.

그 아들 때문에 언니들과 다르게 덜렁 외톨이 같던 내 이름의 비밀까지 한꺼번에 밝혀졌다.

애리, 애란, 돌림으로 이름을 가진 언니들과 달리 지수라는 생뚱맞은 이름이 싫어 어릴 적에 이름 바꿔 달라는 소리를 자주 했었다.


"큰엉가는 애리고, 짠엉가도 애란인데, 와 나는 지수고? 내도 애수로 바까도."


그럼 엄마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내는 지지밴데 와 이름이 남자것노? 이름 바까도라고."


아무리 발악을 해도 눈도 꿈벅하지 않았던 이유를 13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살던 시대에는 형제간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형이 아우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삼촌이었지만 아빠로 부르게 되었던 분이 우리 세 자매의 이름을 지어주신 분. 할아버지의 동생으로 태어나셨지만, 사촌지간의 촌수가 되신 분을 우린 작은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작은할아버지는 할아버지와는 다른 정을 가지신 분이었다. 언제나 당신들 손주와 같이 우리를 반겨주고 예뻐해 주셨다. 아이를 낳아도 집안의 어른이신 할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자, 큰언니도 작은언니도 늘 책을 끼고 계시던 작은할아버지가 한자를 직접 찾아서 지어주셨다.


그중에서도 내 이름에 제일 공을 들였다. 아들을 못 낳아 구박을 받는 걸 보셨고, 엄마도 간절히 아들을 원하시니, 옛 어르신 듯이 그랬다는 이야기를 빌어 위에 누이 이름을 아들 보는 이름으로 지으면 어떨까 하고, 남성의 상징인 버섯이 들어가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여자이름을 너무 성의 없이 남자처럼 지을 수 없어 중성적으로 나름 고심하며 지었던 이름이었다.

작은할아버지의 고뇌와 정이 담긴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작은할아버지의 정성으로 지어준 우리 세 자매의 이름은 당시 '숙'자나 '희'자 돌림이 많았던 우리 세대에서는 나름 세련된 이름이었다.


한편, 셋째까지는 쳐다보지도 않던 할아버지께서 아들인 동생이 태어 낳을 때 미역 다발을 한쪽 옆구리에 끼고 이름까지 지어 오셨다.

세상‘세’에 거느릴 ‘제’로 세상을 거느린다는  내 동생의 이름은 '세제'다.


맞다, 거품을 잘 내서 빨래의 때를 잘 빼주는 그 세제랑 같은 글자다. 아무도 숨은 뜻을 묻지 않는다. 발음 나는 대로 불려지며 한때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동생을 위해 내 이름 속에 들어오게 된 영지버섯을 용서하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탁배기와 야쿠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