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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삭제 Jun 26. 2023

탁배기와 야쿠르트.

외할머니와 탁배기.

외할머니의 손에 들린 누런 주전자가 내 손으로 전해진다.

여기저기 손때가 묻고, 찌그러진 작은 주전자는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인 나보다 더 오랜 연륜을 간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주전자의 쓰임을 알기에 나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그려진다.


“탁배기 좀 바다오이라.”


어린 나는 외할머니의 탁배기 심부름을 좋아한다. 꼬불거리는 시골길을 총총 작은 걸음으로 십여 분 걸어가면 외갓집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점빵이 나온다.

 

“아지매, 할매가 탁배기 바다오라 햇으예.”

“온제 왔더노? 어메가 데부다줏더나?”

 

시골의 작은 점빵아지매는 똑똑하다.

시도 때도 없이 심부름을 오는 나와 같은 아이의 할머니가 누구인지, 그 할머니의 딸이 누구인지 어디서 누구랑 왔는지 다 안다. 엄마가 나를 외갓집에 데려다주고 간 것까지 다 알고 있다.


“돈은 할매가 주끼라예.”


시골의 작은 점빵아지매는 착하다. 돈을 가지고 가지 않아도 탁배기와 과자를 얼마든지 집어준다. 가끔 먼 곳에서 온 뉘 집의 손녀에게는 새우깡 하나 정도 그냥 주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에게도 어쩌다 가끔 과자도 줬고, 알사탕도 먹으라며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기도 했다.

 

“할매 탁배기 바다왓다.”


탁배기를 받은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나무 대문을 대차게 차고 들어선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외할머니 앞엔 이미 술상이 차려져 있다. 익을 대로 익어 대문에서부터 쉰내가 진동하는 김치와 찌그러진 양푼 잔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다. 외할머니와 나 달랑 둘인데, 잔도 두 개다.


맞다, 나는 외할머니의 탁배기 심부름도 하지만, 술친구도 해준다.

 

“할매, 내도내도!”


주둥이를 내밀고 탁배기 주전자에 군침을 흘리는 나를 보고 외할머니가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옆에 가져다 놓은 야쿠르트 하나를 까서 내 양푼 잔에 붓는다. 그리고 찌그러진 주전자를 살짝 기울였다 금방 거둬들인다.

겨우 한 방울 들어갔으려나, 그래도 외할머니를 따라 새끼손가락을 쭉 펴서 잔속에 야쿠르트가 잘 썩이라고 열심히 휘휘 젓는다.

 

“할매 짠, 짠!!”

 

밥상 위에서 외할머니의 진짜 탁배기와 나의 야쿠르트가 담긴 양푼 잔이 부딪치면 찰랑거리는 외할머니의 탁배기가 살짝 흘러넘친다.

반도 안 찬 나의 야쿠르트는 누가 봐도 색으로는 탁배기 못지않다.

 

“크으~”


탁배기를 단숨에 들이키는 외할머니의 추임새를 따라, 나 또한 야쿠르트를 단숨에 들이키고 ‘캬~’하며 손등으로 입을 쓰윽 닦는다.


입 안으로 퍼지고 목으로 넘어가는 그 어디에도 탁배기의 맛은커녕, 미지근한 야쿠르트의 달달함만 감돈다. 그러나 따라 하는 추임새만은 여느 술꾼 못지않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미소 짓는 외할머니의 주름 가득한 얼굴 속으로 나를 보고 있는 눈이 사라진다.

 

“할매! 내가, 내가!”


이번에는 내가 할머니 양푼 잔에 탁배기를 양껏 따른다. 그리고 나에게도 야쿠르트 하나를 더 까서 따른다. 하지만 이번엔 내 야쿠르트 속에 주전자를 기울이지 않는다. 외할머니는 눈속임으로 따르는 탁배기라도 두 번 따라주지 않았다. 분위기를 맞추고 기분을 내는데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래도 나는 외할머니를 따라 새끼손가락으로 열심히 야쿠르트를 휘휘 젓는다. 그리고 빠뜨리지 않고 양푼 잔을 부딪치며 낡은 추억을 쌓듯 잔을 찌그러트린다.

  

당시는 어린 나를 데리고 술을 마신다고 엄마에게 혼이 많이 났던 외할머니였다.

어린 마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외할머니와 마주 앉아서 하는 그 모든 행동이 즐겁고 재미있어 좋았다.


시간은 내 안에서만 흐르는 것이 아니더라.

이제 시간 속에서 머물러 있는 외할머니와 계속 시간을 걸어가고 있는 나는 함께 할 수 없기에, 그때라도 외할머니의 탁배기 잔과 나의 야쿠르트 잔을 기울였던 그 기억이 나는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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