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그릇을 찾으러 간다는 엄마를 서둘러서 막아섰다. 그리고 빛보다 빠르게 엄마 앞을 스쳐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배달도 종종 하던 우리 ‘코리아나 분식’은 엄마가 직접 배달을 가고 그릇을 찾으러 갔다. 음식이 담긴 쟁반은 무거웠지만 빈 그릇의 쟁반은 가벼워 바쁜 주말에는 언니들도 나도 그릇 찾는 일을 도와주곤 했다. 그러나 언니들과는 다르게 언제나 마지못해 툴툴거리며 하던 셋째 딸이 먼저 나서자 엄마는 기특하기보단 의심스럽게 쳐다볼 뿐이다.
뒤통수로 꽂히는 시선이 가렵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내겐 목표가 있으니.
신승훈, 이승환, 서태지와 아이들, 신성우, 이덕진. 그중에서 단연 최고는 우리의 오빠 신승훈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통점을 가진 삼총사의 우정은 끈끈했다. 새로 나온 앨범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학교가 끝나자마자 같이 레코드샵으로 쫓아갔고, 영어단어보다 가사를 먼저 외웠다. 기사가 실린 잡지를 사서 서로 돌려보고, 만나면 반갑다고 나누는 이야기는 늘 우리의 오빠 이야기였기다.
그런 그가 우리가 사는 작은 도시에서의 콘서트를 위해 몸소 납신단다. 그 특종은 사춘기 소녀들의 가슴속에 순식간에 불을 지폈다.
딸이 좋아하는 오빠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던 친구의 엄마는, 달마다 신승훈이 실리는 모든 잡지를 다 사줄 정도로 통이 컸다. 그랬기에 콘서트 티켓도 당연히 사주었다. 그리고 밀어주진 못했지만 말리진 않았던 또 한 친구는, 친구가 모은 용돈에 모자란 돈을 보태주는 나름 후원을 해주는 엄마였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음악프로 방청석에 앉아 좋아하는 가수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소녀들을 보며,
“저노무 가쑤나들은 느므 돈 버는기 뭐시 저리 좋다 악악거리노!”
우리들의오빠에게는 관심도 없고 냉정한 엄마였다. 그런 엄마에게 콘서트에 가야 하니 표 살 돈을 달라는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용돈을 받지도 않고 있어서 어딘가에서 돈이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돈이 나올 때가 없었다.
분식집 가게 금고 속 돈을 훔쳐서라도 콘서트 비용을 마련해야 했다.
나의 삥땅 작전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엄마를 도와주는 착한 딸인 척 행동하면서 빈 그릇을 찾을 때나, 가게를 보면서 계산할 때 조금씩 빼돌렸다.
총총 잰걸음으로 음식을 배달시킨 곳으로 가서 그릇을 챙기고, 야무지게 음식값까지 받아 나온다. 그리고 잠시 주위를 살핀 뒤 이천 원을 빼서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는다. 이로써 목포 금액을 다 채운 내 얼굴엔 사악하고도 흥분된 미소가 걸린다.
수일에 걸친 그 삥당 사건은 착한 딸은 아니었지만, 정직했던 나를 나쁜 아이로 만들었다.
"니가 독서실을 간다꼬"
역시나 믿지 않는 눈치다. 그러나 평소 이불속에서 헤매고 있을 주말 이른 아침 시간에 나가야 하는 적당한 핑계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 오빠의 콘서트 당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찍 가서 줄을 서야 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우리 삼총사는 계획을 세웠다. 무조건 일찍 가는 것이 답이긴 했지만, 어떤 이유건 중학생이 새벽 시간에 집을 나선다는 것을 엄마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두 친구가 새벽에 먼저 가서 자리를 잡기로 했다. 뒤늦게 출발하는 내가 기다리는 시간에 먹을 간식을 싸서 가기로 했다.
도시락까지 싸서 가야 했기에 내가 댈 수 있는 적당한 핑계가 독서실이었지만, 당연히 엄마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이 공부만한 안전한 핑계가 또 있을까.
공연장에 도착해서 친구를 찾았을 땐 우리 앞으로 20명 정도 있었다. 새벽 4시에 도착한 친구 말로는 자신이 다섯 번째로 도착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처럼 시차를 두고 얌체같이 끼어든 아이들 때문에 줄이 점점 길어졌다고 했다.
그래도 세어보니 충분히 가까이에서 우리의 오빠를 알현할 수 있다는 기쁨에 남은 다섯 시간을 거뜬히 견딜 수 있었다. 서로의 공통점을 가진 낯선 우리들은 금방 친해졌다. 기다리며 먹기 위해 싸 온 간식들을 나눠 먹고 서로가 알지 못했던 오빠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며 웃고 즐기며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공연을 한 시간도 채 남겨두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관광버스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버스의 크기와 숫자에 압도당해 놀라는 것도 잠시, 단체 관광이라도 왔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곧장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길게는 열 시간 짧게는 서너 시간을 기다린 아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기다린 노고에 보답하는 좋은 자리를 빼앗기는 건 아니냐고. 아이나 다를까, 들어간 공연장엔 시간이 되어 들이닥친 관광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이 똑같은 티를 맞춰 입고 공연장 1층 좌석 반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지금처럼 지정석의 티켓도 아니고, 팬클럽의 문화에 대해 정보가 많지 않았던 촌구석 아이들에게 생소했던 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새벽 4시부터 기다린 친구가 제일 억울해서 설치는 바람에 내 억울함은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무대 위 우리의 오빠가 모습을 드러내자, 터지는 함성에 불만은 묻히고 떼창이 시작되었다. 우리 오빠의 노래로 관광버스를 타고 온 팬클럽도 작은 지방 소도시 팬들도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나의 십 대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오빠와 관광버스 팬클럽이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나 삼십 대의 끝자락 어느 겨울에 다시 나타났다.
오랜만에 오빠를 만나러 가던 날. 공연장 입구에 세워진 관광버스를 보고 난 다시 ‘헉!!’하고 놀란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웃음이 났다.
그러나 이제 글로벌하게 성장한 우리의 오빠가 아니던가. 일본 팬들이 연말에 3일 동안 하는 ‘신승훈 연말 콘서트 패키지’라는 여행 상품으로, 정말 관광을 온 관광버스였다.
이제 지정석이란 제도로 늘어선 관광버스에 내 자리를 빼앗길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비록 삼총사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내 왼쪽에도, 내 오른쪽에도 나와 비슷한 또래가 각자의 사춘기 시절을 기억한다. 그를 향한 마음은 조금 식었지만, 낯설게 앉아 있는 옆의 두 사람과 각자 다른 시간 안에서, 어딘가 겹치는 추억 하나는 간직한 채, 무대에서 그가 중간에 가르쳐 주는 안무를 함께 춘다.
자리에서 일어나 리듬에 무릎을 맡기고 두 팔을 나풀나풀하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관광버스 춤 같아 보이는 건 나이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