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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삭제 Jun 29. 2023

푸른 겨울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중학교 2학년 새로운 학기의 시작에,


새침한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아 있던 너의 첫인상을 말하자면 사실 별로였어.


똑 부러질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이 맘에 안 들었고, 정갈하게 정리된 너의 노트가 나와는 맞지 않았어. 그런 나의 속마음을 모르는 넌 언제나 친절했지.


추리 소설에서 참지 못하는 궁금증은 언제나 사건으로 이어지고, 로맨스 소설 속 남녀주인공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적인 만남으로 연결되지.


괜히 미운 친구와 갑자기 친해지는 계기는 같은 관심사였지. 결코 같을 수 없는 너와 나에게도 맞는 하나는 있었어.


그 시절 난 『서태지와 아이들』이 최고인 친구들 사이에서 『신승훈』을 좋아했고, 언니들의 영향을 받아 『푸른 하늘』, 『공일오비』 같은 밴드 노래도 많이 들었지.


특히 『푸른 하늘』의 ‘눈물이 나는 날에는’은 돌려 듣기를 반복해서 정품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였어. 지금도 가끔 가사를 곱씹어 보면 눈물 나게 좋더라.


반에서 겨우 한두 명이 가지고 있는 미니 카세트가 너에게 있었고, 쉬는 시간이면 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던 네게 샘이 났었어.


어느 날 뺏어 들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내가 늘어나도록 듣던 노래였고, 그렇게 각자의 커다란 동그라미가 겹치며 공통분모가 만들어졌지.


『푸른 하늘』의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글도 잘 쓰는 너였지. 직접 쓴 글이라고 내게 내민 너의 노트를 보고, 어느새 너를 닮아 가고 싶었어. 나만의 노트를 만들어 나만의 이야기들을 적어 갔지만, 차마 보여 줄 수 없는 창피함에 언제나 감추기만 했던 나와는 달리, 넌 언제나 뭐든 보여주고 공유해 주었지.


 

3학년이 된 우린 반이 갈라졌지만, 더 자주 만났지. 너의 반으로, 나의 반으로 번갈아 가며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까르르 즐거웠지.

하교 후에는 서로의 집으로 다니며 『푸른 하늘』로 시작해 『신승훈』으로 끝나던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가물거리는 기억이 되어 버렸어.


『푸른 하늘』의 해체 소식에 마지막 콘서트를 가고 싶어 하던 넌 혼자 그 먼 길을 다녀왔고, 그들의 라이브 실황을 담은 음반이 나오기가 무섭게 샀지.


어느 날 너의 집으로 갔을 때, 너의 방 한쪽을 차지하던 당시 최고의 브랜드 ‘인켈’ 오디오.

늘 바빠 함께하지 못한 네 아버지의 빈자리에 쌓여가는 선물이 난 그저 부러웠어. 그날따라 난 아빠가 괜히 미웠어.


“스피커에 귀를 대고 들어봐, 공연장에서 듣는 느낌이야.”


같은 시골에서 자랐지만, 사투리를 쓰지 않는 너의 말투는 언제나 다정하고 차분했어. 앉은키보다 더 높은 스피커를 하나씩 차지한 우리는 음반 하나가 다 끝날 때까지 말이 없었지.


라이브 공연 실황이라 그런지, 아니면 오디오의 성능이 좋아 그런지, 흐느끼며 우는 유영석의 숨소리조차 그대로 전해지더라. 앞에 앉은 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귀가에 들리는 유영석의 울먹임은 내 가슴을 간질거리게 했지.


“겨울 바다에 가고 싶다.”


눈물을 훔치며 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


“그래, 가자.”


그에 나도 답을 주었지.


우린 혼자 어디든 갈 수 있는 어른이 되면 겨울 바다를 보러 가자 했는데. 그때는 같이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나 푸른 하늘이었지.



 

비린내가 나는 바닷바람이 얼굴을 쓸고 간다. 하얀 거품을 품은 파도가 내게 닿을락 말락 밀려든다.

생각보다 바닷바람은 차갑고, 노래 가사처럼 파도가 숨을 쉬는지도 잘 모르겠다.


바닷가를 지키는 등대가 ‘나 여기 있다.’고 신호를 보내고, 환청처럼 귓가에 ‘겨울 바다’가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이젠 어디든 갈 수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같이 하지 못하는 너와 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냥 시간이 흘러갔고, 그 시간 안에 서로를 넣지 않았을 뿐.


그 시간 속에서 서로를 찾지 않은 건, 너와 나의 겨울 바다가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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