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숙모는 미용사였다.
방학이면 늘 작은삼촌 집으로 가서 사촌들과 놀았다.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면 달라지는 머리 모양이 그저 신기했다. 작은 숙모의 공간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든 예쁘게 척척 변신해서 나갔다. 작은 숙모의 공간은 어린 내겐 호기심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식당을 하던 우리 집 옆에 미용실이 있었다. 미용실에 세 살배기 아기가 귀여워 자주 드나들곤 했다. 그 미용실에 주로 오는 손님들은 서비스 쪽 계통에 몸을 담은 언니들이었다. 그들의 화려한 머리 또한 미모에 눈을 뜬 내겐 호기심이었다.
늘 잔소리만 같았던 엄마의 걱정, 무뚝뚝하기만 한 아빠. 내리 딸만 셋인 집에 태어나 귀함을 받던 동생에게 치이는 삶이 싫었다. 무엇이든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는 나이가 되면 이 집을 떠나리라 다짐했다.
"내 미용학원 보내도, 자격증 따가 졸업하고 설 가끼다!"
미용사가 되겠노라 말했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 공부해야 하는 나이에 미용사가 되겠다고 했다. 기술을 배워 집을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슬슬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착실한 준비는 아니었다. 켜켜이 쌓여있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야단을 칠 것 같았던 부모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첨부텀 공부가 아이다시푸모 땔 치우고 지술이나 배아라!"
"미용보담 빵 지술이 안 낫나?"
심지어 아빠는 제빵 기술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아빠의 뜻은 완고했다.
"인자 빵이 대센기라."
"안 하끼다! 내가 빵 만들몬 사람들이 내가 다 묵을 줄 알몬 우짜노?"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체격은 괜한 자격지심으로 발동했다. 그렇게 며칠을 아빠와 신경전을 벌였다.
아빠는 딸들의 모든 직업에 관여하셨다. 여자의 직업으론 간호사만 한 게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이유로 큰언니를 간호학과로 보내는데 일조했고, 지금은 그와 관련된 사무직에서 일하고 있다.
소위 날라리 생활에 발을 잠깐 담근 작은 언니는, 자기 머리만 믿고 공부를 안 한 케이스다. 어른들이 말하는 머리는 똑똑한데 노력을 안 하는 애였다.
언니의 핑계를 빌리자면, 그 노력을 해야 하는 시기에 사춘기가 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고 한다.
그 결과로 작은 언니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학에 갔고, 본인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방탄하기 그지없는 날들을 보냈다.
아빠의 사전에 재수는 없었지만, 더는 지켜보지 못해 작은언니를 자퇴시켰다. 내가 뿌리쳤던 제빵 기술은 작은언니에게로 넘어갔다. 그 당시 흔하지 않던 ‘호텔제빵’ 학과에 보냈다. 지금 언니는 형부와 작은 빵집을 하고 있다.
내가 미용학원에 가게 된 계기는 의외로 어이없고 조금 슬펐다.
1994년 당시 미용학원은 10만 원, 제빵학원의 학원은 20만 원으로 두 배의 차이가 났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넷이나 되는 자식을 키우는 부모님의 입장에선 매달 10만 원이란 금액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끝까지 제빵을 밀고 싶었던 아빠는 돈 앞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셨고, 정 원한다면 허락한다는 말로 딸의 고집에 한풀 꺾어 주는 자존심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10만 원을 무게감을 덜기 위해 선택한 미용학원에선 크게는 가발, 작게는 이런저런 자잘한 소모성의 생각지도 못한 재료비 지출이 10만 원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그리고 욕심이 생긴 나는, 피부에 메이컵에 굳이 그곳에선 배우지 않아도 되는 종목까지 배워 부모의 등골에 살짝 금을 가게 했다.
매번 재료비 명목으로 돈을 타갈때면, 차라리 제빵학원을 보낼걸 그랬다며 아빠는 10만 원에 자존심을 꺾은 일을 살짝 후회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