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를 붙잡고 하소연을 해 본들, 이미 세상 밖으로 나와 버린 아이를 도로 집어넣을 수도 없지 않은가.
엄마는 셋째 딸을 낳은 몇 시간 만에 험난하고 아슬한 은하수 오작교를 몇 번을 오가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엄마가 내린 특단의 조치는, 집안 대대로 하는 음력 생일을 셋째 딸에게만은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박가와 이가가 만나, 결실을 본 집안의 셋째는 이렇듯 기구한 사정으로 다른 식구들과는 달리 첫돌부터 8월 10일 양력 생일을 찾아 먹게 되었다는, ‘견우와 직녀’ 못지않은 집안의 설화가 생겨났다.
어린 나이에는 음력과 양력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해마다 양력으로 날이 변하는 가족들의 생일과는 달리, 항상 같은 날이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말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꾸 날이 바뀌어 복잡한데 늘 같은 날이라 기억하기 편해서 좋았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날짜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방학 중인 생일에 친구를 초대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유치원 때부터 목걸이처럼 핸드폰을 걸고 다니던 시절도 아니고, 집으로 전화해도 방학이라 친척 집이며, 가족들과 계곡으로 떠나버려 연락이 닿지 않았다. 8월 10일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놀러 가기 딱 좋은 날이 아닌가. 그렇다 보니 친구 생일에 초대받아 뿌린 선물들을 거둬 들이 방법이 없었다.
아홉 살의 나는 점점 심통이 났다. 친구들에게 생일선물이 받고 싶었다. 작은 머리를 굴린 끝에 내린 결론은, 음력 생일을 나의 양력 생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작전에 돌입.
날짜와 집 약도까지 상세히 적고, 색색의 알록달록 화려하게 폭죽까지 그려 넣은 초대장을 만들어 돌렸다.
“옴마 나 친구들 생일 초대 하끼다. 생일파티 해주라!”
지금이야 하나 아님 둘인 아이들의 생일파티를 학교, 학원, 심지어 어린이집 동기생 친구들로 나누어서 한다지만, 당시만 해도 먹고살기 바쁜 우리 부모님은 넷이나 되는 자식들의 친구를 초대해 생일파티를 해줄 여유가 없었다. 귀하디 귀하게 키운 아들도 해주지 않았던 생일파티가 아니던가.
“이기 와 이라노? 안즉 생일 될라모 한 달이나 남았그만.”
“아이다 인자부터 내 생일은 7월 7일이다! 아들한테도 글켓다. 그리 알아라.”
“야가 참말로 뭐시라카노? 음력 생일을 치도 팔월이구만 오데서 맹한 소리고.”
“실타! 인자 고마 내 생일은 7월 7일로 할끼다.”
당당하게 말했다.
내 생일은 이제 내가 정한 날이라고, 그러나 어디 그게 씨알이나 먹힐 소린가. 엄마에겐 여전히 말띠 해에 칠석은 젊은 남녀가 헤어져 울고불고 난리가 난 날이라 못내 미더웠다. 그리고 엄마 말대로 음력으로 날을 따진다고 해도 내 생일은 여전히 팔월이었다.
내가 원하는 양력 7월 7일과 음력의 7월 7일은 평소 견우와 직녀처럼 쉽게 만날 수 없는 날이었다.
그러나 아홉 살의 객기에 그런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엔 기필코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파티를 해야만 했다. 울고불고 매달려도 보고, 단식투쟁까지 감행하면서 확고한 의지를 불살랐지만, 각기 다른 개성의 넷이나 되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나의 불타오르는 집념에 콧방귀도 날리지 않았다. 급기야 온몸으로 바닥을 구르며 발악에 가까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죽어버릴 거라는 엄포도, 그저 철없는 셋째 딸의 투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돌린 초대장의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자, 심장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급기야 뭘 갖고 싶냐 물어오는 친구들 앞에서 선물은 필요 없다며, 축하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속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대인배가 되어가고 있었다.
생일 선물이 받고 싶어 저지른 수작인데, 정작 선물을 마다하는 내 모습은 참으로 처량했다.
이대로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생일파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작전을 바꿔 말 잘 듣는 아이로 거듭나 보기로 했다. 어떤 심부름이든 척척 하기 시작했고, 동생을 놀리지 않고 성심성의껏 잘 돌보아 주었다. 언니들에게 대들지 않고, 말 잘 듣는 동생이 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착하게 잘하고 있으니 제발 생일파티를 해 달라고.
그러나 절을 다니는 엄마의 마음속엔 돌부처 수백 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선 어떠한 술법도 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생일파티 사수 전쟁에서 난 결국 패하고 말았다.
친구들에겐 집에 갑자기 생긴 일로 생일파티를 하지 못한다고 말해야 했다. 아홉 살이란 어린 나이에 내 말을 이해해 주는 친구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트집 잡아서 야유를 보내는 친구 또한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린 그저 아홉 살의 천진함으로 잘 지냈다.
내 가슴에 억울한 눈물이 흘러넘치는 걸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늘 하던 여름 방학도 시작되었다. 내 생일 또한 변함없이 찾아왔다. 찰밥에 미역국을 중심으로 생선, 불고기, 잡채, 나물들이 상을 가득 채웠지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렇게 한 상 부러지게 차려줄 거면서 한 달 앞당긴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어린 가슴에 못을 박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