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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삭제 Jun 22. 2023

와? 가스나고?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는 사내만 자식이라 여기는 고집 센 조선시대 대감님 같으셨다.

당신의 말이 곧 법이요, 계집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도 과분하다는 남존여비 사상을 생활신조를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시던 분이셨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손녀들에겐 따뜻한 눈빛 한번 주지 않던 무서운 분으로 기억한다.

결혼해서 내리 딸 둘을 낳은 엄마는 그런 할아버지에게 아들 못 낳는 며느리로 찍혀, 70년대 당시에나 통할 법한 구박을 받았다.


엄마가 둘째 딸을 낳든 해 시집을 온 작은어머니가 다음 해에 첫째로 아들을 떡 하니 낳아버렸다. 비교 대상까지 생겨버린 엄마의 시집살이는 하루가 십 년 같았다.


지금의 저 출산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70년대 말 인구 폭발로 인해  국가에서 내건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말들은 엄마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의 자궁 속에 자리 잡은 세 번째 아기는 반드시 아들이어야만 했다. 그런 간절함으로 잉태된 것이 ‘나’였다.


엄마는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이번엔 꼭 아들이라고. 낡은 집터의 음침한 기운이 하늘을 찔러 눈에서 불이라도 쏠 것 같은 눈빛의 무당도 아들이라 자신했다.

1970년 말 경상남도 저 끝 진주. 거기서도 더 들어간 ‘면(面)’에서 다시 비포장을 달려 도착한 ‘리(里)’라는 마을에선 그런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무당의 말에 누구라도 ‘혹’하고 넘어가곤 했다.

그렇게 나는 열 달을 아들인 채로 살았다.

그러나 나는 모두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엄마와 할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달고 나와야 할 간절함을 달지 못한 채 온 집이 떠나가라 아들인 척 당당하고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내 울음은 곧 엄마의 대성통곡에 묻혀 버렸다.


“와 가스나고? 와? 와 머스마가 아이고!”

엄마는 외할머니가 끓여준 미역국도 먹지 않고 울었다.


할아버지는 또 딸이라는 소식에 당연하다는 듯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당신의 둘째 아들이 아이를 셋씩이나 낳았지만, 찾지도 안부의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는 시아버지에게 며느리의 서운함이란 말로 다 못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엄마의 열 달의 희망은 무너졌고 나의 호강은 엄마 뱃속에서 보낸 열 달이 전부였다.

처음부터 아들딸 상관없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당시의 시대적 모토를 따를 수 없었던 엄마는 남들에게 다 있는, 특히나 큰집도 작은집에도 있는 아들을 꼭 낳고 싶다는 오기로 발동했다.

아들만 있는 집 속옷도 입어보고, 아들 낳아준다는 신이 있는 방향으로 정성을 다한 기도도 올렸다. 아들 잉태에 좋은 음식까지 가려 먹는 별의별 미신까지 다 접하는 만전을 기했다. 그리하여 결국 나를 낳고 삼 년 만에 우리 집에 아들의 통쾌한 울음이 지붕을 날렸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던 선조의 뜻을 받들어 엄마의 시집살이 해방을 외치듯, 1981년 삼일절에 우리 집안의 역사도 새로이 쓰였다.


그 덕인지 엄마의 미신 신앙은 한동안 엉뚱한 곳에 발현이 되어 간절함을 발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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