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돌아보면 탈린에서는 따뜻하고 포근한 기억들 밖에 없는 것 같다. 탈린의 기억이 담겨있는 일기장을 넘기면 푸근한 향기가 날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탈린 여행을 한 단어로 정의해 달라고 한다면 ‘무작위’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무작위의 날들과 무작위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삼 일간의 시간은 마음 한편에 꿈같은 시간으로 남아버렸다. 바에서 무작위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고 그릴 수 있었고 호스텔에서 무작위로 만난 사람들과는 다음을 약속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함께 한 방을 공유한다는 공통점 만으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아마 호스텔의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아직은 언어가 서툴다는 혼자만의 이유로 내가 먼저 말을 걸거나 같이 놀자고 묻지 않는데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은 서슴없이 다가와서 함께하자고 물어봐 줘서 너무 고마웠다. 혼자 여행을 오면 나름 각자 혼자만의 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들은 정해진 일정보다는 불확실한 하루를 받아들이고 즐기는 모습이 멋있었다. 아직은 나에게 여행이라 함은 그곳의 풍경과 볼거리를 최대한 즐기는 것인데, 이렇게 타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혼자 여행할 때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어디를 꼭 가겠다, 무엇을 꼭 먹겠다는 강박을 조금은 내려놓고 내 앞에 일어나는 일을 생각 없이 즐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첫째 날 밤에는 혼자 바에 갔다가 핀란드에서 온 삼촌들 한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삼촌들 중 한 명이 와서 나의 전공을 물어보면서 자연스럽게 직업의 영역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되었다. 그분이 나에게 꿈을 물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추상적인 것 말고는 없다고 대답했더니, 자신의 동료들과 같이 의논해 보자고 하셨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모두 자신의 일처럼 고민하더니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현실적으로 해결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들으면서 정말로 마음을 토닥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들은 말 중에 가장 와닿았던 말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말고 항상 너 자신이 되라는 것..
Be yourself and don't give a fuck about others
이 한 문장이 별거 아닌듯해도 나에게 정말 많은 힘을 주었다.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자신이 없고 미래가 안 보여도 그 일을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탈린의 겨울은 정말 매력적이다. 누군가 탈린 여행을 어느 계절에 오면 좋을까 물어본다면 쉽사리 여름이라고 대답할 수 없다. 너무 추워서 손이 다 얼어도 눈 오는 날이 주는 탈린의 느낌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빨간 지붕에 소복하게 쌓인 눈과 그 눈을 비추는 노오란 불빛, 조금 젖은 듯한 돌길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탈린의 구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안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은 마치 중세에 시간이 멈춘 듯하다.
탈린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을 손꼽아보자면, 핫초코를 두 손에 꼭 쥐고 일몰을 바라볼 때라고 말할 수 있다. 일몰 시간이 다가오면 항상 마음이 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어떤 멋진 일몰이 기다리고 있을까 약간의 설렘과 함께 완벽한 모습으로 일몰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그래서 언덕에 있는 조그만 카페에서 핫초코를 테이크아웃해서 전망 좋은 곳에 털썩 앉아서 핫초코를 호호 불어가며 서서히 내려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일몰은 언제 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저마다의 감동을 준다. 이어폰을 꺼내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캐럴을 재생하고 노랫말을 새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또, 테넷의 첫 장면에서 나온 린나홀 앞에서 눈을 맞으며 광활한 바다를 바라볼 때 최고조의 행복감을 느꼈다. 린나홀로 향해서 갈 때 정말 예쁜 눈이 펑펑 내렸다. 팔을 활짝 벌려서 눈을 온몸으로 맞아보기도 하고 눈 속을 힘차게 달려보기도 하면서 눈 송이가 하나하나 떨어지는 모든 순간을 즐겼다. 린나홀을 가로질러 마침내 바닷가 앞에 다다랐을 때 눈으로 흐려져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보면서 당장은 앞이 안 보여도 계속 가면 언젠가는 길이 보이는 게 흐릿하고 어두운 바다 풍경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항상 여행 오면 느끼는 거지만 지구본을 두고 내가 있는 곳에서 줌아웃을 해봤을 때 지금, 이곳에, 내가 서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생각했다.
탈린에서도 현대미술관에 방문했는데, 재미있는 점은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현대미술관에 갈 때마다 미술작품의 표현 방식이나 의도가 그 나라의 색을 잘 반영한다. 에스토니아 예술에서는 과감함을 많이 느낀 것 같다. 생소하고 충격적이고 어두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들도 많았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서 깊은 의미를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채로운 색을 사용하고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예술로 표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묘하게 다른 차이점을 다른 나라의 현대 미술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탈린에서도 런던과 같이 혼자 여행을 했지만, 런던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삼 일 동안 지냈지만 삼 년을 지낸 것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호스텔의 친구가 우리 모든 일 다 그만두고 하이 스쿨 뮤지컬처럼 영원히 같이 이렇게 지내자고 할 정도로 포근하고 함께여서 행복했던 여행이었다. 현실로 돌아가 이제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모두의 기억 속에 탈린은 영원히 남을 것 같다. 이번 여행이야말로 현재, 이 순간을 즐기자는 말을 느끼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P.S. 탈린에서 예쁜 사진들을 많이 찍었는데 핸드폰을 도난당해서 남은 사진이 없다.. 그러므로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사진들로 채워야 할 것 같다. 탈린의 사소한 모습까지 모두 담았는데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니 허무하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