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 기초 - 논리학이란?

논리학은 말싸움이 아니다

by 이정빈

‘논리적이다’라는 말은 일상에서 자주 쓰인다.

대개는 “저 사람 말이 세다”, “토론에서 잘 이긴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래서 논리학을 떠올리면, 누군가는 궤변을 간파하는 기술을, 누군가는 말빨을 키우는 학문을 연상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논리학의 출발점과는 거리가 꽤 멀다.


논리학은 본래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틀리지 않기 위한 학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결론이 어떤 전제들로부터 정당하게 따라 나오는지를 따지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감정도, 설득도, 화술도 본질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논리학이 다루는 것은 오직 구조다.


논리학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관심을 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다음 두 문장은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논리적 구조는 같다.

S1: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S2: 모든 바이러스는 변이 한다. 오미크론은 바이러스다. 따라서 오미크론은 변이 한다.

수학 또는 국어 시간에 배워봤을 대표적인 삼단논법의 활용 예시이다.


논리학은 “전제가 참이라면, 결론은 반드시 따라오는가?”를 본다.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추론은 타당(valid) 하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 하나가 생긴다.

많은 사람들은 ‘논리적이다 = 참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논리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제가 모두 거짓이어도, 결론이 현실과 전혀 맞지 않아도 추론의 형식이 올바르면 논리적으로는 타당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논리학은 진실을 보장하는 학문이 아니라, 진실이 될 수 있는 최소 조건을 관리하는 학문이라는 성격을 드러낸다.


또 하나의 흔한 오해는, 논리학을 배우면 ‘정답을 잘 고를 수 있다’는 기대이다.

하지만 논리학은 결론을 제공하지 않는다.

논리학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이 결론을 원한다면, 최소한 이런 전제들이 필요하다.” 즉 논리학은 사고를 자동화하지 않는 대신 사고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다. 이 결론이 불편하다면,

이 판단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 문제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전제의 선택 문제다. 논리학은 우리에게 “어디서부터 잘못 생각했는지”를 보여주지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까지 대신 정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논리학은 종종 차갑게 느껴진다. 가치 판단도, 감정도, 도덕적 직관도 배제하려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논리학은 윤리학, 정치철학, 과학철학과 협력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논리학이 없으면, 논쟁은 신념의 충돌로 끝나기 쉽다.


따라서 논리학의 실제적인 역할은 옳은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잘못된 생각을 걸러내는 것에 가깝다. 인간은 항상 오류를 범한다. 화법에서, 문장 구조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특별히 멍청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스럽게 빠지기 쉬운 사고의 습관이다. 논리학은 인간을 더 똑똑하게 만들기보다는, 덜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논리학은 낙관적인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전제로 출발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논리학은 어디에 쓰이는가. 거의 모든 학문에 접한다 생각하면 된다. 세상의 모든 학문을 파다 보면, 그 중심에는 철학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논리학이 바로 그 역할을 담당한다. 컴퓨터, 수학을 파다 보면 수리철학을. 과학을 파다 보면 과학철학을. 법과 정치를 파다 보면 정치철학, 법철학을. 논리학은 이러한 모든 과목에 기반이 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논리학은 화려하지 않다.

말을 잘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기술도 아니다.


다만 하나는 분명히 보장한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생각이 어떤 구조 위에 서 있는지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점에서 논리학은 생각을 단련하는 학문이기보다,

생각에 대해 책임지게 만드는 학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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