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날이 제일 기억에 남는 이유

무의 그 날, 기억에 남는 날.

by 이정빈

아무 일도 없던 날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를 떠올리다 보면, 우리는 기억을 대하는 방식부터 다시 생각하게 된다. 보통 하루를 설명할 때 우리는 늘 무언가를 덧붙인다. “그날은 정말 바빴어”, “중요한 일이 있었지”, “큰 결정을 내린 날이야.”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하루가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사건이 없는 하루는 마치 공백처럼 취급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날들이 먼저 떠오른다. 분명 달력에는 아무 표시도 남지 않았을 하루인데, 기억 속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다. 정확하게 무슨 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날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데, 창문 너머로 들어오던 빛의 방향이나, 책상 위에 올려둔 컵의 온도, 괜히 느리게 흘러가던 오후의 공기 같은 것,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에 의한 먼지의 이동들은 생생하다.


아무 일도 없던 날에는 서사가 없다. 시작과 결말이 없고, 긴장도 반전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정리’하지 않는다. 의미를 붙이지 않고, 평가하지도 않는다. 잘했는지 못했는지, 효율적이었는지 아닌지를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날에는 생각이 느슨해지고, 감각이 전면으로 올라온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던 계산이 잠시 멈추고,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하루를 통과한다.


기억은 늘 의미가 큰 것을 붙잡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한 날은, 나중에 보면 그 의미만 남고 실제의 그 느낌은 사라진다. 반면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던 날은,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시간이 지나도 변형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떠올릴 때, 그날은 이야기라기보다 장면처럼 돌아온다.


아무 일도 없던 날이 유독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날의 나는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고,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서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냥 하루를 살아냈을 뿐인데, 그 ‘그냥’이라는 상태가 오히려 드물다. 늘 무언가가 되어야 하고, 도달해야 할 지점이 있는 삶 속에서, 아무 일도 없던 날은 잠시 정지된 시간처럼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날을 떠올리며 묘한 그리움을 느낀다. 특별히 그날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날의 속도, 그날의 밀도, 그날의 나 자신이 지금보다 덜 조급했고 덜 분주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는다. 그 기억은 위로라기보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았다’는 한마디처럼 작동한다.


아무 일도 없던 날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하루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던 하루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기억한다. 설명할 수 없고, 자랑할 수도 없고, 기록으로 남기기도 애매하지만, 삶의 결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었던 하루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하루가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의 복잡한 날들 사이에서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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