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억을 외주화 하는 사람들과의 심리전

관계의 무질서와 경계의 기술

by 가온담

그들은 늘 뭔가를 잊는다

“그거 내가 해야 했나?”
“아, 깜빡했네.”
“다음엔 꼭 할게.”


그 말들은 늘 부드럽게 들리지만,
이상하게 듣는 쪽은 피로해진다.


그들은 단순히 ‘잘 잊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세계에는 ‘책임의 주소’가 희미하다.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기억의 주인을 잃은 사람들이다.


관계의 작은 코미디

내가 오랫동안 관찰해 왔던 몇몇 사람들은
마치 시트콤에 나오는 상황처럼,
변함없이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간다.


① 프로 과대평가형
한 번에 몰아서 여러 가지를 처리하는 걸 효율이라 믿는다.

“내가 다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이틀 뒤, 같은 말을 다시 한다.

“그거 내가 했던 말이었나?”

결국 일은 엉켜 있고, 그들은 여전히 태연하다.

이걸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저 “내 방식이야.”로 마무리한다.


② 즉흥 포기형
오늘 생각나면 하고, 생각 안 나면 잊는다.

기분이 좋을 땐 뭐든 하겠다고 나서지만,

막상 해야 할 순간엔 늘 사라진다.

“지금은 피곤하니까.”

그들의 일정은 도파민의 양에 따라 움직인다.

후회는 잠깐, 변명은 길다.

그리고 모든 미완은 내일로 이월된다.


③ 합리화형 위탁자
나중 일을 생각해 미리 챙겨두라 하면,
그들은 손을 내젓는다.


“그런 게 왜 필요해.”
“메모까지 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


그 말투엔 늘 가벼운 웃음이 섞여 있다.
하지만 그 안엔 ‘기억할 의지의 결여’가 숨어 있다.


준비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잊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뒤,
필요한 순간이 오면 이렇게 말한다.


“지금 새로 사면 되지.”
“그런 게 필요했다면 미리 말하지.”


책임은 타인에게,

그들에게 잊는 건 실수가 아니라,
습관이자 태도다.


④ 주의력 분산형 폭발자
이들은 모든 일을 동시에 벌인다.
우선순위는 없다.
그중 어느 한 가지에 꽂히면,
다른 일들은 그대로 멈춘다.


시간이 흘러 현실 자각 타임이 찾아오면
이미 사방이 엉망이다.
원상 복구는 엄두도 못 낸다.
일은 벌이지만, 마무리는 못 하는 습관.
그게 그들의 고질병이다.


결국 말한다.
“나도 모르겠다.”


그 상태 그대로 방치한다.
그리고 곧 ‘대신 처리해 줄 사람’을 찾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응급 상황이라 부르며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염시킨다.
“지금 진짜 급해. 나 좀 도와줘야 해.”


하지만 그 ‘급함’은 대부분,
자신이 만든 혼란의 부산물이다.


그들의 짜증과 분노는 사실
자신의 과부하를 인식하지 못한 뇌의 비명이다.
도와달라는 외침 속에는
“나는 지금 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절규가 숨어 있다.


결국, 그들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자신의 무질서를,
타인의 질서 위에 올려놓는 것.


그들은 왜 그럴까

이들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뇌의 구조적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잘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게
너무 부끄럽고 두렵다.


그래서 부인한다.
“난 원래 이런 스타일이야.”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무능을 성격으로 위장한다.


합리화한다.

“그거 별거 아니었잖아.”
잊은 일의 중요도를 스스로 낮추며,
실패의 무게를 줄인다.


투사한다.

“네가 제대로 안 알려줬잖아.”
자기 기억의 구멍을
타인의 책임으로 메운다.


전치한다.

“왜 나한테 뭐라고 해?”
자기 실수의 불안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피한다.
“지금은 얘기하기 싫어.”
대화의 문을 닫고,
상황을 봉인한다.


이 모든 방어의 밑바닥에는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 두려움이,
결국 타인의 피로로 변환된다.




인지 피로의 징후

같은 말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한다.

“그거 내가 말했잖아”라는 문장을 자주 쓴다.

일정이나 약속을 대신 챙겨야 한다.

결국 “내가 기억을 맡아버린 관계”가 된다.

→ 이건 배려가 아니라, 인지의 불균형이다.




경계의 기술

이들을 개선시켜 보려는 나의 시도는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방향을 바꿨다.


그들의 혼란을 줄이려 애쓰는 대신,
나의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기로 했다.


1. 책임의 언어로 말하기
“이건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나는 네가 계획 세우면 도와줄게.”


2. 감정적 설득 대신 시스템으로 말하기

“잊을까 봐 캘린더에 추가해 둘게.”
“이건 문자로 남길게.”


3. 도움의 크기를 조절하기
도움을 주되, 대신하지 않는다.

기억을 상기시켜 주되, 대신 저장하지 않는다.

이건 냉정이 아니다.

존엄의 최소 단위다.


관계의 질서, 삶의 리듬

도와준다는 이름으로
타인의 무질서를 대신 짊어지면,
사랑도 책임도 왜곡된다.


진짜 관계는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스스로 관리할 줄 아는 관계다.
그 안에서만 존중이 작동한다.


도움을 주는 건 관계를 세우지만,
대신 살아주는 건 관계를 무너뜨린다.


이제 나는
타인의 혼란을 구조하지 않는다.
대신, 나의 리듬을 지킨다.


'시스템'은 냉정이 아니라,
사랑의 또 다른 형태다.


품격 있는 거리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책임을 위탁하는 것은 다르다.


그 차이를 배우는 일,
그게 성숙의 첫 단계다.





연재〈작업 기억력 시리즈 〉3


이전 글 〈머릿속 책상이 너무 좁을 때〉

다음 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들〉



#작업기억력 #관계심리 #감정경계 #사유의 지도
#메타인지 #감정노동 #품격 있는 거리두기 #인지심리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머릿속 책상이 너무 좁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