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른 팀장님과 농담처럼 주고받은 대화가 마음에 남았다. 나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누가 시키는 일만 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코딩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로봇 같다”고 웃으며 답했다. 나 역시 장난처럼 “그중에서도 버그 많고 버퍼링 심한 구형 모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요즘 기계도 학습한다”며 받아쳤고, 나는 “나는 구형이라서”라고 넘겼다. 그러자 그는 “그래도 예전 것들이 더 핫하다. 레트로 소장품이 되면 되지”라고 말했다. 나는 급히 “그럼 오래오래 간직될 소장품이 되겠다”고 마무리했다.
웃으며 끝난 대화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묵직했다. 나는 언제부터 스스로를 이렇게 낮춰 말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릴 적의 나는 달랐다. 스스로 생각했고,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를 좋아하면 끝까지 파고들었고, 열정은 계산하지 않아도 흘러나왔다. 그런데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노력은 항상 인정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용기는 때로는 무모함으로 평가받았다. 몇 번의 좌절 이후 나는 조금씩 전략을 바꾸었다. 튀지 말자, 과하게 기대하지 말자, 책임질 일을 줄이자. 그렇게 ‘선택하는 사람’에서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시키는 일만 잘하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도망이 아니라 방어였을지도 모른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줄어들고, 먼저 나서지 않으면 다칠 일도 적다. 안전한 자리에서 정해진 역할만 수행하는 것. 그것은 무기력이라기보다 생존 방식에 가까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로봇일까. 로봇은 자책하지 않는다. 로봇은 자신의 구형 여부를 고민하지도 않는다. 나는 버그가 많다고 말했지만, 그 버그는 망설임이고 책임감이고,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버퍼링이 길다는 건, 함부로 선택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멈춘 것처럼 보여도, 안에서는 여전히 계산하고 배우고 있다.
요즘 기계도 학습한다고 했던 그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학습은 완벽한 존재가 하는 일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는 존재가 하는 일이다. 나는 구형일지 몰라도, 전원이 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업데이트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예전처럼 다시 뜨겁게 달려야 할까, 아니면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머물러야 할까. 아마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일 것이다. 거창한 변화를 꿈꾸기보다, 아주 작은 선택 하나를 다시 스스로 해보는 것. 오늘 하루 단 하나라도 내가 정한 일을 해보는 것. 그렇게 ‘결정권’을 조금씩 되찾는 연습을 하는 것.
나는 더 이상 나를 구형이라 부르지 않으려 한다. 오래된 모델일 수는 있어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고, 스스로를 업데이트하려는 의지가 있다. 언젠가 누군가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남는 레트로가 된다면 좋겠다. 유행을 좇지 않아도, 오래 쓰일 수 있는 사람.
버퍼링은 고장이 아니라 준비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멈춘 것이 아니라, 다음 문장을 불러오는 중일 뿐. 그리고 나는 아직, 계속 살아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