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녀'가 그냥 예능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여성 연예인들이 팀을 짜서 축구를 하는 TV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을 즐겨 본다. 국내 스포츠 컨텐츠 중 단연 No.1 이라고 남들에게 전도(?)까지 할 지경이다.
골때녀 얘기를 먼저 좀 하자면, 단순 스포츠 중계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인 만큼 경기 내용뿐만 아니라 팀과 선수(라고 하자, 연예인이지만 여기서 만큼은)에 대한 서사에도 많은 부분 분량 할애를 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처음으로 '각잡고' 해보는 축구 경기에 어떤 팀이 잘하고 또 어떤 선수가 잘하는지를 보는 것도 재밌지만, 경기 전-중-후 선수들이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또 다른 재미 포인트다.
특히 경기 전후 짧은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자주 눈물을 보이는데 이 눈물도 들여다보면 꽤나 입체적이다. 팀원들에 대한 미안함이나 고마움, 자신이 잘 못한 것에 대한 자책, 승리와 성장에 대한 감격스러움, 패배에 대한 분함과 각오 등 복합적이고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아주 '날 것'이라서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가 많다. 한 예로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 실패한 선수가 경기 패배 직후 인터뷰에서 "'졌잘싸(졌지만 잘싸웠다)'는 없어요"라며 자책의 눈물을 보인 대목이 나에게는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꼭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경기 중에도 요즘 말로 '과몰입'을 자아낼 때가 또 있는데 바로 골을 넣고 '찐'으로 좋아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날 것의 느낌, 그러니까 연예인 누구가 아닌 그냥 한 인간이 순수하게-경쟁에서 일궈낸 성취에 대해-기뻐하는 걸로 보여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연예인으로서의 품위, 특히 방송 컨텐츠에서 다뤄지는 '보통의 젊은 여성'의 모습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면들이라 참신하게 느껴질 정도다.
'나도 저런 걸 해보고 싶어'
'한 번도 저런 거 느껴본 적 없는 것 같아, 왜 저런 걸 못해봤지?'
내 어깨너머로 골때녀를 보며 아내가 던지는 말들은 주로 이랬다. 골때녀에서처럼 같은 여성들끼리 하나의 팀으로 뭉쳐 상대팀과 경쟁하고 그 안에서 느끼는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감정들을 경험해보고싶다는 것이다.
같은 걸 보면서도 아내와 나의 공감 포인트가 다르다. 나는 경험한 눈으로, 아내는 경험해보지 못한 눈으로 그녀들의 축구를 보고있는 것이다.
'축구? 뭐 그 재미지 뭐'
아내의 말을 듣고 아마추어로 20년 넘게 축구를 해온 나의 설명은 이랬다. 축구가 그냥 공가지고 패스하고 슛하고 골넣고 하는게 다인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 경험은 입체적이다. 축구를 하다보면 경기장 안에서 팀원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말로, 제스쳐로, 때로는 눈빛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요구하고, 요구 받는다. 팀원에게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하고, 나의 실수에 대해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경기 내용이나 결과에 따라 같이 기뻐하기도 하고 복기하며 서로 웃기도 하고 화나서 비난하기도 한다.
크게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할만하지만 또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스포츠라는 것이 짧은 시간에 과정과 결과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특히 개인이 아닌 조직의 관점에서 보면 공동의 목표와 성과가 짧으면 몇십분, 길어도 2-3시간안에 결판이 나기때문에 그 짧은 시간 안에 팀원들간의 다양한 의사소통이 집약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학교나 회사에서의 단기 팀 프로젝트와 비교하더라도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고, 훨씬 더 역할과 책임이 명확하고, 시작과 끝도 훨씬 더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
그래서 이런 팀 스포츠 상황에서 겪게 되는 역할 경험과 의사소통 경험은 단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파악하고 수행하며, 팀에서 요구하는 바와 내가 생각하는 방향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점을 찾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목표를 위해 나갈 수 있는지, 어떠한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짧은 시간 안에 강렬하게 겪어 볼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입체적이고 다양한 환경 한 가운데로 나를 던져 놓는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자면 내가 혼자 잘했을 때보다 2-3명, 많게는 4-5명이 순간적으로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패스의 연결,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가 이루어져 골로 연결될 때,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눌 때 가장 희열이 큰 것 같다. 혼자서 뭘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만, 2인 3각 경기처럼 내 다리와 상대방 다리가 하나 될 듯 말 듯, 수 없이 많은 시도와 실패 속에서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다 함께 노력하는 것, 나는 바로 그 '잡힐 듯 말듯 한' 재미로 축구를 한다.
아내는 '왜 못해봤을까'하며 아쉬워했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단체 스포츠는 선택이나 기호가 아니라 아예 '기회의 박탈'의 개념에 가깝다. 자의든 타의든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단체 스포츠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이 여전히 단조롭고 또 그것이 견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여성들 스스로가 내면화하게 되면 단체 스포츠 참여 자체를 '생각해본 적조차 없거나' 혹은 '내가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믿게 된다. 몇 년 전 여성 스포츠 시장을 이해하기위한 가벼운 리서치 인터뷰에서 기억나는 여성들의 코멘트는 '고상하게 땀 흘리고 싶다', '운동하며 망가지기 싫다'였다. 점점 여성의 스포츠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 형태가 다양해졌다거나 질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필라테스, 골프, 테니스 등 특정 운동만이 주로 여성들에게 소비되고 그것이 여성들에게 소위 '힙한' 것임을 보면 여전히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이 무엇인지 그녀들의 스포츠 참여 형태로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골때녀로 돌아와서, 방송을 보며 부러움 섞인 아내의 말을 곱씹고 조금은 씁쓸해진다. 그녀는 상당히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지만, '여성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힐 때 자주 좌절하고 무기력해한다. 사회 생활가운데 속한 어떤 조직이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적극적인 의사표현이나 불만과 같은 감정 표현에 앞서 자기검열할 때가 많다고 얘기한다. 나는 그녀가 축구를 하며 동료들을 독려하는 모습, 적극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모습,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슬프지만 30대 초반인 그녀는 그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다. 과연 '끈끈한 팀웍', '끈끈한 우정' 이런건 남자만의 전유물일까? 골때녀를 보며 득점과 승리에 다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나, 실점과 패배시에 서로를 다독이는 모습 속에서 오히려 더 강렬한 끈끈함과 하나됨을 엿본다.
팀 스포츠를 좋아할 필요도 없고, 안해도 문제될 건 없다. 하지만 그것이 기회와 선택의 박탈로 인해, 그리고 그 내면화로 인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성향을 떠나 여성이 남성보다 덜 사회적이고 덜 주체적이라고 한다면 어디까지나 사회화의 과정때문일 것이고, 그 사회화의 과정에 고정된 성역할이 강조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의 많은 여성들이 어린 시절부터 팀 스포츠를 경험하고 보다 더 주체적이고 사회적으로 당당한 구성원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러지 못할 것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래도 변화의 가능성을 본다. 수면 밑에 있던 여자 축구의 동호인이 많이 늘고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선수들이 실제로 모델, 배우, 가수 등 연예인들이기에 기존의 '여성성'의 범주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축구로 전이시킬 수 있는 좋은 롤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구 하는 여자'가 골프나 테니스를 하는 것과 비슷한 '힙함'의 대열에 올랐다는 것 같아 반가운 소식이다. 아내도 인근 아마추어 풋살팀을 찾아서 나가보기로 했다고 한다. 역시나 반가운 소식이다.
'골때녀'가 그냥 예능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