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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마라톤 '그란폰도'를 아시나요?

자린이의 그란폰도 도전기이자 그란폰도 해부해보기

by 참새 목공소

그란폰도를 아시나요?


먼저 그란폰도 소개부터.


'그란폰도(granfondo)'는 이탈리아어로 'long distance or great endurance'라는 뜻으로 자전거를 이용한 비경쟁 방식의 동호인 대회를 의미한다. [위키백과]


'long distance or great endurance', 말 그대로 '장거리 & 존버' 자전거 대회인데 쉽게 말해 '자전거 마라톤대회'라고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그란폰도가 120km 내외(100km 초반부터 180km, 혹은 그 이상까지 다양하다.)의 장거리를 자전거로 완주하는 걸 목표로 한다.

120km를 자전거를 타고 간다고요?? (네이버 지도)


120km...? 어느 정도의 거리일까?

서울역에서 자전거길로 춘천역까지가 114km, 직선거리로는 서울역에서 세종시정도까지가 120km다. 이걸 자전거를 타고 간다는 이야기다. (헛웃음)


놀랄 것도 없이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6시간 전후로 120km를 주파한다는 사실에 한 번 더 헛웃음이 난다. (평균속도 20km/h 정도로 6시간을 달려야 한다. 말 그대로 'long distance or great endurance'.)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자전거로 저 산을 넘는다고요?? (사진 : 가평 그란폰도 홈페이지)

120km 거리를 그냥 평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산을 넘으며 가야 한다. 그것도 꽤 높은 산, 2022 가평 그란폰도를 예로 들면 888m 높이의 화악산을 비롯해 600m가 넘는 5개의 산을 자전거로 넘어야 한다. (참고로 북한산 정상 인수봉이 836m이다.)


북한산 등산 어때? / 좋죠! / 자전거 타고! / 네? (사진 : 국립공원)


이쯤 되면 '저걸 왜 해?'라거나 '저걸 내가 어떻게 해' 생각이 들 것이다.

100km가 훌쩍 넘는 무지막지한 거리나, 높은 산을 넘어야 하는 것들만 보면 그렇다. 사서 고생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 '자 여러분, 그란폰도가 이만큼 힘듭니다. 절대로 하지 마세요!'라는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란폰도 한 번 나가보세요!'라고 추천하려는 것이다.


그란폰도를 알아가면서


'오 재밌겠는데?'


하는 포인트들이 있었다. (실제 참가해본 경험담으로서도)


몇 가지를 나열해보자면


1. 보급소! (a.k.a 먹방)

: 자전거 동호인들이 장거리 자전거 라이딩 중 수분이나 에너지를 보충해주는 것을 '보급'이라고 부르는데, 그란폰도는 대규모 대회에 걸맞게 주최측에서 코스 구간 구간마다 참가자들을 위한 공식 '보급소'를 운영한다. 그란폰도 참가시 2-3군데 이상의 보급소를 들를 수 있다. (2022 가평 그란폰도 기준, 총 127km의 구간 중 각각 27km, 65km, 90km 세 지점의 보급소를 운영했다.) 이 보급소에서는 물과 음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는데 아이스크림, 바나나, 에너지바는 기본이고 대회에 따라서는 어묵, 붕어빵, 핫도그 같은 맛있는 것들을 제공하기도 한다고 한다.


아이스크림 회사가 스폰서?! 행복한 기운이 넘실대는 보급소 (사진 : 가평 그란폰도 홈페이지)

가까운 사람들과 같이 대회에 참가해 자전거를 타고 경치 구경하며 보급소에 다 같이 들러서 수다 떨며 꿀맛 같은 먹방을 즐길 생각하니 너무 즐거웠다. 실제로 지인을 꼬실 때 이 보급소 얘기를 했더니 한 번에 넘어왔다. (대회 중 경험한 보급소는 낭만이나 즐거움보다는 조금 더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먹게 되는 느낌이 있었지만.)



2. 공식 대회 - (잘하든 못하든) 오늘 나는 사이클 선수가 된다.

: 내가 언제 자동차가 없는 통제된 도로에서 호위 차량과 오토바이의 보호를 받으며 쾌적한 라이딩을 할 수 있을까? 그란폰도에서는 가능하다.


사이클(로드 자전거)에 입문해서 자전거를 타다 보면 평지로만 된 한강은 조금 지루해지는 시점이 온다. 그렇다고 도로로 나가 본격적으로 라이딩을 하려 하면 자동차와 함께 하는 라이딩은 꽤나 위험하게 느껴진다. 이제 그란폰도에 참가해볼 때가 온 것이다. 그란폰도에서는 주최측과 해당 지자체에서 교통통제를 비롯한 운영을 체계적으로 해주기에 안전하게 라이딩을 할 수 있다.


통제된 도로를 달리니 왠지 더 빨라진 것 같다. 일명 '대회뽕' (사진 : 가평 그란폰도 홈페이지)
이제 이걸 자전거에 붙이면 나는 오늘 사이클 선수로 빙의한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느낌을 또 언제 받아보리. 잘 타든 못 타든 이날만큼은 대회 모든 참가자가 주인공이 된다. 배부받은 참가 번호표를 자전거와 옷에 붙일 때, 출발 지점과 골인 지점을 통과할 때, 마치 내가 선수가 된 것 같은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저 멋진 골인 지점을 내가 통과한다는 상상을 해보자. 완주의 감격을 극대화 해준다. (사진 : 가평 그란폰도 홈페이지)


3. 비경쟁 방식 대회, '힘들면 탈락하지 뭐'

: 그란폰도는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란폰도 대회에 따라서 1등 시상이나 K.O.M(King Of Mountain: 특정 업힐 구간에서 가장 빠른 기록) 시상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등수를 매기지 않을뿐더러 1,000명 이상이 참가하는 장거리/장시간 자전거 동호인 대회에서 등수가 큰 의미가 없다. 실제로 선수급의 '굇수' 참가자들부터 나같이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린이' 참가자도 많았다. 그냥 내 수준에 맞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 최초 나의 목표는 참가에 의의와 완주였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힘들면 포기하면 되지'도 있었다. 등수를 가리진 않지만 정해진 시간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컷오프-cut off'라고 부르는데, 특정 지점에 특정 시간 이후 도착하는 사람들을 버스에 태우고, 자전거는 트럭에 따로 실어 출발지점으로 데려다준다. 이 사실을 알고 첫 출전에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포기의 달콤함도 선택지에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심되기도 했다.


컷오프 참가자 복귀 버스 및 자전거 회수 차량이 출발 장소에 도착한 모습 (사진 : 가평 그란폰도 홈페이지)


한국인은 태어날 때부터 경쟁으로 다져지고 길러져 온 존재들이다. 그란폰도에서도 이 한국인의 종특을 발휘해보자! 나를 앞지르는 사람을 견제하며 경쟁하고 절대 뒤처지지 말고 앞으로 한 단계씩 앞질러 보자! 그러다 보면 결국... 망할 가능성이 높다. 100km가 넘는 장거리, 긴 시간의 페달링 속에서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자의든 강제로든 별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결국은 별 의미 없다. 이것까지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뭣하리. 내가 내 수준을 알고 그에 맞는 목표를 정해서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비경쟁 방식'의 대회 그란폰도가 주는 새로운 도전을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4. 하프 코스의 선택지 - 메디오폰도(Mediofondo)

: '내가 120km 이상을 어떻게 타?'라고 생각하면 메디오폰도로 참가하면 된다. 메디오폰도는 마라톤으로 치면 하프 마라톤의 개념으로, 전체 그란폰도 코스의 반 정도 길이의 구간을 코스로 한다. (2022 가평 그란폰도 예시 - 그란폰도 : 127.4km, 메디오폰도 : 84km) 100km가 훌쩍 넘는 거리와 6시간가량의 지속적인 라이딩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그러던 와중에 메디오폰도를 알게 되어 첫 참가를 메디오폰도로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그란폰도 대회는 메디오폰도를 함께 운영하기 때문에 첫 참가나 초장거리 라이딩이 아직 부담이 된다면 메디오폰도가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란폰도(좌/127.4km) / 메디오폰도(우/84km) (사진 : 가평 그란폰도 홈페이지)


참가 후기 - 성취감에 대하여

2022 가평 그란폰도에서 메디오폰도로 처음으로 참가해본 대회, 84km를 정확히 4시간 30분에 들어왔고, 완주 메달을 받았다. (대회에서 완주로 인정하는 공식 기준을 '컷인 - cut in'이라고 하는데 2022 가평 그란폰도의 컷인 시간대는 그란폰도 6시간 30분 / 메디오폰도 4시간 30분이다.) 장시간 유산소 운동에 자신이 있는 편임에도 꽤나 힘들었고 특히 힘든 업힐(오르막 구간)로 악명 높은 화악산과 도마치재를 오를 때 정말 힘들었다. 자전거에 내려서 끌고 올라가는 '끌바'를 하며 겨우 올랐다.

메디오폰도 완주메달 (사진 : 나)


마지막 결승점을 통과할 때 근처에 계시는 다른 참가자나 가족들로 보이는 몇몇 분들이 박수를 쳐주셨고 왠지 모르게 뭉클하고 희열이 있었다.


흔히들 인생을 '레이스'에 비유하는데, 이 식상한 비유에 대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 인생을 레이스라고 한다면 과연 골인 지점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시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과정만 있는 레이스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이스 골인 지점에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레이스. 그렇다면 이 레이스를 마치더라도 우리는 이를 추억하며 충분히 만끽할 시간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성취감의 측면에서도 인생이라는 레이스의 성취를 골인 지점에서만 따져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먹먹할 것 같다.


그란폰도는 길지만 끝이 있었고 짧은 시간에 압축해서 시련, 고통, 내리막, 휴식, 성취감 등 다양한 체험의 장을 제공했다. 완주 후 며칠간 업힐에서의 고통보다 완주 후 느꼈던 성취의 달콤한 기억으로 살 수 있었다. 무려 '또 나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아니, 나는 아마도 또다시 그란폰도에 나가게 될 것이다.


그란폰도의 경험이 달콤한 게 느껴진 것은 인생이라는 레이스가 '종국이 되어보아야 결판나게 되는 총체적인 복기, 혹은 결론의 시간'이라는 무거운 불안을 조금 덜어주었기 때문일까.


인생이라는 레이스는 결판을 내는 레이스가 아니다. 이 레이스는 그 자체로 라이브(LIVE)이고, 나는 어떠한 결판을 내려고 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종국의 종국에 가서야 나는 결판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의 레이스에 의미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내 수준을 알고 그에 맞는 레이스를 펼치며 그 안에서 달리고, 쉬고, 버티면서 그 과정 안에서 느끼고 만끽해야 한다.


그란폰도에서 수많은 다양한 참가자들과 함께 한 라이딩은 인생이라는 레이스가 남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경쟁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하는 레이스라는 겸허한 깨달음도 함께 주었다.


아마도 나는 또다시 그란폰도에 나가게 될 것 같다.


자린이의 메디오폰도 도전기


이상에서, 감히 이런 분들에게 그란폰도 참가를 추천한다.


- 사이클(로드 자전거)에 입문한 지 1년 내외

- 한강 라이딩은 전부 평지라 조금 지루해졌다

- 중/장거리(40km 이상) 라이딩을 해봤다

- 같이 라이딩을 할만한 사람이 1-2명 이상 있다

- 일상에서 '뭐 재밌는 이벤트 없나' 생각한다
- 작든 크든 나만의 성취감에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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