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을 채우는 여행

호주 브리즈번

by 양정회

예전의 나는 나라와 대도시를 중심으로 ‘찍고 또 찍는’ 여행을 했다.

남미를 비롯해 아프리카, 유럽, 북미, 아시아까지. 수십 개국 백여 개 도시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많이 보는 것이 좋은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르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여행, 그곳에 천천히 스며드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호주 브리즈번 사우스뱅크 공원에서 운영하는 줌바댄스를 예약했다. 잘생긴 강사의 구령에 맞춰 음악에 몸을 맡기고 동작을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온몸이 땀에 젖는다. 현지인도, 여행자도 구분 없이 함께 웃고 소리 지른다.


다음 날 오전,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플리마켓에 갔다. 구경하다가 배가 고프면,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크레페 두 개와 커피를 사 들고 강둑에 돗자리를 편다. 강을 오가는 배들을 바라보며 커피 한 모금에, 크레페 한입 베어 문다. 그리고 햇살과 강바람을 받으며 돗자리 위에 드러눕는다.


이른 아침에는 강변을 따라 조깅하고, 밤이 되면 분위기 좋은 펍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신다. 강을 가르는 페리, 하늘과 구름, 그리고 스토리 브릿지의 야경까지.


그 풍경 아래 그동안 꼭꼭 눌러 두었던 속마음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다독인다.


어느 날은 도심 공원에 돗자리 깔고 한나절을 뒹굴뒹굴한다. 간식 조금 준비해서 가면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기도 한다. 산책하는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들, 현장학습 나온 학생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그 여유마저 여행의 일부가 된다.


최근에 다녀온 몰타에서의 한 달 살기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물며 그곳의 골목길을 걷고, 창문의 모양을 눈에 담고, 산책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는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고 저녁놀을 바라보며 하루를 채운다. 지중해에 발을 담그고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여백이 있는 시간이 좋다.


이제 나는 속도를 자랑하는 여행자가 아니라 여백이 있는 여행자다. 많이 가는 것보다 깊이 머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삶도 다르지 않다.

서두르며 지나치기보다 한 장면에 오래 머물고 하루의 여백을 스스로 채워가는 삶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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