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달팽이에는 계절이 산다
B급 반려동물과의 곡진한 일상
집에 대왕달팽이가 산다.
"아, 저는 달팽이를 키우는데 좀 커요."라고 말하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
계란보다 큰 등껍질을 지고 있는 그게, 달팽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하는 것 같다.
그런 비상식적인 생명체 두 마리가 집에 있는 야채를 번갈아 축낸다. 이름은 계피와 덕원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을 붙였다. 정식 학명은 'Achatina fulica'라는데, 이건 어떻게 읽는 건가. 아차티나 풀리카?
어려울 것 없다. 식용 달팽이다. 색에 따라 백와, 금와, 흑와라고도 불린다. 유치원에서 키워 보라고 나눠 주는, 마트 애완동물 코너에서 좁아터진 통에 가둬 놓고 파는 달팽이다. 대부분은 어느 정도 커지기 전에 죽어버리고 말지만. 하지만 죽건 말건 부담이 없다. 애초에 달팽이란 놈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어서, 껍질 안에 숨는 것과 알을 많이 까는 것 말고는 종족을 보존할 방도가 없다. 알을 많이 까니 공급이 쉽고 저렴하다. 태생부터가 B급이다.
계피와 덕원을 처음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거북이나 물고기처럼 귀염성 있고 예쁜 동물이나 키워볼까 했는데, 어두운 애완동물 용품 틈바구니에 뭐가 있더랬다. 너무나도 비좁은 통에 웬 달팽이 두 마리가 같은 방향으로 기어가고 있었는데, 그게 왜 그리 애달파 보였는지 모르겠다. 이 거친 세상에 서로만이 유일한 약속처럼 보였달까. 그래서 데려왔다.
달팽이는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다. 거북이와 물고기는, 개와 고양이만큼은 아니어도 번듯한 반려동물로서의 입지가 있다. 그런데 달팽이는 뭔가. 살갑지도 귀엽지도 않다. 심지어 보는 재미도 없다. 그나마의 장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저렴하고, 키우기 쉽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유치원 애들한테 던져주고 관찰일지나 쓰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집에 들이게 되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돈이며 시간이며 잔뜩 써야 한다. 그에 비해 달팽이는 얼마나 편한가. 대충 물 뿌려주고 먹다 남은 상추 던져 주면 죽지 않고 산다. 그마저도 귀찮아지면, 달팽이는 어떤 소리도 냄새도 없이 껍데기 속에 콤팩트하게 들어가 죽어버린다. 뒤처리도 쉽다!
그런 고로, 달팽이는 영원한 대체품이다. 철저한 B급 애완동물이다. 그런데 나는 왠지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에 끌렸다. 누구도 딱히 원하지 않는 것, 적당히 상처 받고 망가진 물건에 애착이 갔다. 그걸 힙스터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B급은 마음이 편하다. 애초부터 B급을 표방하는 무언가라면 더더욱. A급이나 S급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B급의 정체성이다. 일류는커녕 이류도 못 되는 삼류가 본질이다. 그런데 그 자족성이, 어떤 선(禪)을 머금고 있는 듯한 그 초연함이 사람 마음을 이끈다.
달팽이는 무해하다. 식물들은 생각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비교적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생명체를 뒤쫓아가 경동맥을 물어뜯지도, 콧잔등을 할퀴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자신에게 주어진 야채를 탐닉한다.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할 최강의 매력을 보유하진 못했어도, 다른 누구를 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달팽이의 운명이자 행운이다. 1등이 아니어도, 아무도 해치지 않고 그저 평온히 살아가는 일은 온전히 B급을 위한 것이다.
계피는 등껍질 모양이 이상하다. 못 먹고 커서, 등껍질 한가운데가 굵어지지 못하고 납작한 모양이다. 달팽이의 등껍질에는 그들이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기록된다. 달팽이의 시간은 균일하게 흘러간다. 단순한 일상을 지닌 존재가 누리는 특권이다. 마치 나이테처럼, 달팽이의 시간을 머금고 아주 조금씩 굵어져 가는 게 달팽이의 등껍질이다. 그 속에는 시간이 살고 계절이 산다. 조용하고 집요한 변화의 흔적이 산다. 등껍질의 가는 눈금은 달팽이 삶의 타임라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등껍질의 지름이 확장된 지점이 우리 집에 온 시점과 그 전을 구분하는 타임라인이다. B급 나름의 소소한 재미와 매력을 지닌 부분이다. 그렇게 조용히, 아무도 해치지 않고 살아가며 시간의 흔적을 몸에 아로새긴 달팽이는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과 닮았다. B급이기에, 무게 잡지 않고 더듬더듬, 우당탕탕. 아등바등 남을 밟고 일어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 말이다. 다만 깊은 숲의 현자처럼 시간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 말이다.
어쨌든 그렇기에 달팽이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 밥을 안 주면 기록이 남는다. 바코드처럼 정보를 담고 있는, 영원한 수수께끼 같은 줄들의 기록이. 나의 일상이 거기에 있다. 상추를 먹여 키운 나날들, 피곤해서 애호박 주는 걸 깜빡하고 자버린 나날들, 귀찮아서 건새우와 칼슘을 덜 준 나날들 말이다. 내 기분과 성의와 정성과 나태가 한 생명체의 형태로 남는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형태이기도 하다.
덕원이 먹이를 미처 다 먹지 않았다. 날이 추워지면 아프리카 출신인 이놈들은 입이 짧아진다. 활동량도 줄어든다. 가을이 한 바퀴를 돌아 달팽이에 내려앉았다. 다음 계절, 그다음 계절이 눈송이처럼 사붓이 덕원과 계피의 비루한 등껍질에 깃들길, 늦은 밤 못난 주인은 바란다. 이들의 존재가 B급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증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로부터 오는 동질감 때문만도 아니다.
가을이 왔고, 우리는 여전히 같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