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하는 일은 다 잘 안 되고, 마음속에서 걱정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지친 나를 두고 세상만 시계 초침처럼 재깍재깍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여러 대처 수단을 찾아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도 안 갈 정도로 퍼마시거나, 따뜻한 물에 잠겨 몸을 이완시키거나, 운동에 몰두하거나. 그렇지만 이런 수단들은 우리의 매일과 너무나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일상으로부터 오는 근심 걱정을 떼어 내기에는 개운치 못한 감이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의 탈출구만이 남아 있다. 여행이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고, 근데 멀리 갈 여건은 못 된다고. 버릇처럼 생각하던 바를 친구에게 말해 버렸다. 서울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닌 친구가 추천해 준 곳은 종묘였다. 생각을 정리하기 좋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서울을 밥 먹듯이 드나드는 나였지만 늘 다니던 곳만 오가던 터였다. 종묘도 이름만 알지 가 본 기억은 없었다. 접수 완료. 오늘 밤은 푹 자고, 내일 아침에 종묘로 떠난다. 맑은 정신으로 조선의 정결한 기운을 느껴 보리라 다짐했다. 서울로의 여행이라니, 맨날 다니던 서울이었지만 여행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괜히 설렜다.
하지만 여행에는 늘 변수가 작용하기 마련이다. 종묘로 떠나기 전날 밤에 만난 군대 동기들의 손에 붙들려 피시방에서 별 재미도 없는 게임을 하느라 밤을 꼴딱 새 버렸다. 밤새 모니터를 들여다본 눈에는 핏발이 섰고, 잠시도 쉬지 못한 뇌는 각성 상태가 되어서 졸린 줄도 모른다. 새벽 다섯 시 십 분, 동기들과 작별하고 건대입구에 혼자 있었다. 괴성을 지르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을 지나쳐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슬 맺힌 담배꽁초, 인적을 피해 잠자리를 옮기는 노숙자, 조금씩 늘어나는 자동차들, 이상하게 선명했던 롯데리아 전광판. 대한민국의 새벽은 그렇게 밝아 오고 있었다. 어서 여길 떠나고 싶었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했고 맨 뒷자리에 털썩 몸을 실었다. 잠시 눈이나 붙여 볼까 했는데, 이대로 잠들면 못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만 감은 채 흐릿하게 들려오는 "이번 정류장은..."에 귀를 기울였다. 제법 많은 사람이 버스를 타고 내렸다. 같은 일상의 공간이지만 목적과 시간이 달라지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버스의 에어브레이크 소리도 옛날 기차의 증기 소리 같이 들렸다.
이윽고 역에 내려 종묘를 향해 걸었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니 바로 종묘가 보였다.
짙은 밤안개에 싸인 종묘는 도심 속에 있었지만 별개의 공간 같았다. 종묘 주위의 시간도 소리도, 안개의 모습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로등 밑을 가득 채운 밤안개는 종묘의 첫인상.
입구에 도착하니 당연히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개장은 아홉 시부터였다. 이왕 온 김에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종묘를 둘러싼 돌담을 따라 왼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날이 그리 춥지는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주황색 거리에 이르면 종묘와 상가촌은 매우 가까워진다.
종묘와 오래된 상가촌은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무표정하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의 가운데를 따라 마냥 걸었다. 걷기 위해 걸은 것이 얼마만인지. 아주 천천히 걸었다. 들리는 거라곤 내 발소리뿐이었다.
사진을 잘 찍지 않는데, 시선을 기록하고 싶어서 사진을 몇 장 찍어 두었다. 다행이다.
한 그릇 먹어 보고 싶었는데, 사장님이 웅크린 채 주무시고 계셨다.
세월이 느껴지는 간판. 이런 게 괜히 좋다. 번창하시길.
좁은 길 하나만을 가운데 두고 있는 종묘와 상가촌
누군가의 작은 배려
걷다 보니 나온 긴 터널. 참 많은 생각을 하며 걸었던 것 같다.
슬쩍 빠진 골목길에서 만난 낯선 풍경. 휑한 느낌의 건물과 화려한 회전목마의 대비가 이질적이었다.
'작은 배려'의 수혜자?
어느덧 동이 텄다.
이렇게 걸었는데도 일곱 시 남짓. 아직도 아홉 시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서 막 문을 연 근처 스타벅스로 터벅터벅 향했다. 출처 모를 기프티콘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베이글 하나를 먹고, 쪽잠을 잤다.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고 아홉 시가 가까워져 다시 종묘로. 매표소 앞을 서성이고 있으니 친절한 관리자 분께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표를 사고 들어가니, 오늘 첫 손님이라고 책을 한 권 선물로 주셨다. 기쁜 마음으로 종묘로 들어섰다.
선물이라면 뭐든 기분이 좋다.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종묘는 커다란 정원 혹은 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노란 흙길이 쭉 이어진 가운데 나무들이 멀리까지 서 있었고 깊지 않아 보이는 연못이 있었다. 평일이어서 그랬는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종묘 안에서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마침 핸드폰도 꺼져서 머리를 비우고 그저 천천히 걷기만 했다. 종묘는 나의 감각에 충실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소였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청설모와 까치, 두껍게 쌓여 있는 낙엽, 그 위로 떨어지는 낙엽 소리가 다만 몽롱한 정신에 들어왔다. 당장 종묘의 대문 밖에는 차가 씽씽 다니고 사람들이 출근하느라 바쁘지만, 지금의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왕들의 숨결이 머무르는 곳인 만큼, 종묘는 고요하고 신성한 느낌이었다. 나를 둘러싼 그 모든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뭐라고 말을 거는 것만 같았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머릿속은 이하 여백.
문득 왕도 죽는데, 결국 죽고 나면 이처럼 고요한데 근심걱정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공(空) 한 상태로 종묘를 한 바퀴 걸으며 청설모를 총 다섯 마리 봤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고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대인, 1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그렇지만 종묘를 거닐던 순간 내가 느꼈던 현재에 충실한 감각은 여전히 생생하다.
일상적이지 않은 요소를 가지고 일상의 공간 속에 숨어 있는 여행지로 몰래 여행을 떠나 보자. 이번 겨울에는 몇 번이고 떠날 예정이다. 오래 멀리 떠나지는 못한다 해도,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많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마음과 그 과정만으로도 분명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