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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bara Dec 27. 2021

취미핥기 #1-달리기

정직한 태고의 움직임

 나는 취미가 많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취미도 있고 그렇지 않은 취미도 있다. 관심이 가는 것을 건드려 본 뒤에 나와 맞는 취미라면 계속 관심을 이어 나간다. 난 개미핥기처럼 깔짝깔짝 취미 맛을 보는, 취미핥기인 셈이다.  무언가를 직접 '맛보는' 것과 단순히 옆에서 '보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다른 일이다. 겉핥기 수준일지언정, '맛'을 아는 게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처럼, 다양한 취미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효과적으로 해결해 주는 창구가 된다. 동시에 나는 아마추어가 되는 것을 즐긴다. 한 분야의 프로가 되기는 어려워도 다양한 분야의 아마추어가 되기는 비교적 쉬운데, 아마추어의 자세로 세상 속 여러 활동을 접하는 일은 즐겁다. 성과가 아닌 과정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느냐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결정적인 차이다. 자신이 택한 분야에서의 작지만 꾸준한 성장을 스스로 관찰하는 일은 아마추어의 즐거움이다. 초심자와 아마추어 사이에도 분명한 벽이 존재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의 옹벽만큼 견고하고 높진 않으니 다행이다.




이제 달리기 이야기를 해 보자.  달리기로 마음먹은 나는 반팔, 반바지 위에 나이키 바람막이 한 장을 입고 러닝화를 신는다. 요즘은 날이 추워 땀이 잘 나지 않지만, 그래도 체온은 금방 오른다. 달리다 보면 이 날씨에도 바람막이 지퍼를 반쯤 내리게 된다. 산을 에둘러 난 고가도로를 통해 강변으로 향한다. 주로 저녁에 뛰는데, 해가 빨리 져 노을은 금세 저물고 별이 뜬다. 그래서 고개를 쳐들고 달리면 별을 따라 뛰게 된다. 달려도 달려도 가까워지지 않지만 목표가 있다는 사실은 위안이 된다. 무릎을 조금 굽힌 채 발의 바깥 측면으로 착지한다. 발가락을 모두 써 땅을 끝까지 밀어낸다. 허리를 곧게 펴고 팔은 가슴께에, 리듬감 있게 흔든다. 정확히 내가 내디딘 보폭만큼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그렇게 줄곧 달리다 보면 호흡의 끝에서 새로운 의식이 피어난다. 이 생의 내가 가져 보지 못한 느낌이다.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온 본능적인 감각이 눈을 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움집이나 동굴에 있을 내 새끼와 아내를 떠올린다. 그것은 이윽고 '달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어지고, 그 명료한 느낌은 달리기에 있어 무엇보다도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이건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내게 주어지는 하나의 감각이다. 아파트에서 멀쩡히 걸어 나와서 달리는 나이지만 어쩔 수 없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 이유는 달리기가 가장 오래된 움직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한다. 유전자에 깊이 각인된 행동과 감각이 수백만 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풍화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달렸고 살리기 위해 달렸다. 달려서 도망쳤고 달려서 잡았다. 달리기는 삶을 위한 최우선의 행위였다. 그래서인지 달리기에선 청량하고 단순하고 절박한, 원시(原始)의 맛이 난다. 다른 어떤 행위에서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맛이다.


달리기 위에서는 모든 것이 간해진다. 지나간 걸음도 다가올 걸음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지금 한 발을 내딛는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발을 내딛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달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달리지 못할 것이다. 두 다리의 왕복운동은 그 사실을 지탱하는 유일한 근거이다. 신체가 뇌로 갈 산소를 몽땅 차지해 버려서인지 뇌는 많은 생각을 하지 못한다. 달리기를 할 때면 내 두뇌마저 단순지는 것이다. 생각을 확실히 비울 수 있다는 것은 취미로서의 달리기가 지니는 커다란 장점이다. 그래서 나는 달릴 때 기록을 재지 않는다. 지금의 속도로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느냐가 전부인 단순함이 나는 좋다. 그리고 뭐랄까, 달리기에는 희망찬 구석이 있다. 하니도 달리고 청춘도 달리지 않는가(달려라, 하니/청춘아!). 20대의 몸으로 달리고 있으면 굉장히 건강한 삶을 사는 청년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사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모두 건강해 보인다. 그들 모두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해 정직한 방식으로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는 건 더 나은 건강일 수도, 외모일 수도, 인생 자체일 수도 있다. 그처럼 목적이 다르다 해도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달리다 마주치는 다른 러너들의 표정을 보면 괴로워 보일지언정 결코 찡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빛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그렇다.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놓인 사람들이 보이곤 하는 눈빛이다.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러너인 나는, 나의 눈빛도 그렇기를 바라며 달릴 뿐이다. 그렇기에 프로 러너와는 달리 오히려 달리는 순간만큼은 시간과 속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주위 풍경을 느끼며, 동시에 풍경의 일부가 되며 다음 발을 내딛는 것이 내 러닝의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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