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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bara May 27. 2024

카피소드 #5." Cup is better than-"

컵이 있으되, 라면이여 저물라


좋은 카피에 깃든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카피소드' 시리즈입니다.


카피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컵라면 파인가요, 봉지라면 파인가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봉지라면 급진주의자'입니다. 컵라면 편에 서신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일평생 컵라면은 봉지라면의 아류일 뿐이라는 신념 하나로 묵묵히 봉지라면을 끓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저 같은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요? 라면계의 월드스타, 닛신(Nissin) 사가 '컵라면은 봉지라면의 아류'라는 생각에 유쾌한 교통사고를 내려 하네요. 비주얼과 카피 모두를 통해서 말이죠.


"Cup is Better Than Ramen"


컨셉 한번 확실하군요


레퍼런스 사이트를 뒤적이다 우연히 만난 광고였습니다. 온에어 연도도 국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컨셉 하나는 확실합니다. 그야말로 병맛입니다. 웬 거대 컵라면이 평화롭게 봉지라면을 끓여 먹던 사람의 집을 부수고 들어옵니다. 이말년 시리즈식 '와장창' 감성으로 시작하는 이 광고,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이어서 컵라면의 우월성을 하나하나 보여줍니다. 물만 부으면 된다, 하던 거 하면서 먹을 수 있다, 맛도 다양하고 식기도 필요 없다, 춤추면서 먹을 수 있다(왜?) 같은 메시지들이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이윽고 토핑도 풍요로운 닛신 컵라면으로 신세계를 접한 봉지라면 소비자가 천국으로 뿅 가버리더니, 컵라면 여신의 품에 안겨 황금빛 안식에 놓입니다.


글쎄, 진짜라니까요.

이처럼 컨셉은 확실한 병맛이지만, 카피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Cup is Better Than Ramen(=Miojo)"


저에겐 이 카피가 라면계의 혁명 구호처럼 들렸습니다. 컵라면의 '컵'을 새로운 명사처럼 내세워 컵라면을 바라보는 인식의 영역을 확보하면서도 그 영역이 원래의 라면보다 위에 있다고 하니까요. '컵라면'에서 '라면'을 생략해 버리는 테크닉이 과감합니다. 하지만 이 카피에서 제일 눈에 띄는 지점은 컵라면은 라면의 대체품일 뿐이라는 통념을 깨는 메시지 자체인 것 같습니다.


좋은 카피에는 이처럼 판을 뒤집어 버리는 힘이 실려 있습니다. '쨉'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기성의 것과 동등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아예 더 낫다고 말해버리는 당돌함이, 사람들의 기억에 기분 좋은 충격을 남기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컵라면, 라면만큼 맛있다!"라고 말하는 카피였다면 아마 제 기억에 남지 못했을 겁니다. 저 파격적인 영상 컨셉과 어울리지도 않았을 테고요.


이처럼 믹스커피가 드립커피보다 훌륭한 지점도, 렌터카가 자차보다 나은 부분도, 소시지가 스테이크보다 좋은 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시선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장점과 단점이 서로를 번갈아 가릴 뿐이겠죠. 마치 렌티큘러 프린팅처럼요.


육조 혜능 스님의 일화가 저에게 이런 교훈을 줍니다. 


어느 사찰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말했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걸 지켜보던 혜능 스님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닌 그대의 마음이다."라고요.


그러니 만약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것을 팔아야 한다면, 스스로에게 무턱대고 우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게 저것보다 더 좋은 거야!"라고요. 이유는 그렇게 말한 뒤에 떠올려도 늦지 않을 겁니다. 좋음의 기준이 컵라면도, 라면도 아닌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이 세상은 주관의 세상이니까요. 

결국 카피라이터의 일이란 주관을 건드리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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