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을 오래 맴도는 한 줄
오늘은 캠페인도 배경도 없이 달랑 카피 한 줄만 들고 왔네요. 이걸 내가 어디서 봤지, 여기저기 찾아봐도 알 수가 없더라고요. 사실 카피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글은 카피라고 생각합니다(아마 일본의). 원래는 카피가 아닌 글이었다고 해도요.
마음대로 '-을'도 붙여 키노트에 실어 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편?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편?
저는 나름 이것저것 해 보려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입사하고 난 뒤에는 점점 뭘 안 하게 되네요. 게을러져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솔직히 좀 무섭습니다. 회사 안인만큼 바보같이 보이기가 싫나 봐요. 한 번 두 번 실수를 할 때마다 다음 행동을 하기가 어려워지고 똑똑한 주변 사람들이 눈에 크게 들어옵니다. 그래서 또 안 친한 친척집에 놀러 온 사촌동생처럼, 사무실 비품처럼 뻘쭘히 있다 보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네요.
어쩌면 그래서 더 제 마음에 꽂힌 카피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 않는, 과 하는, 앞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비주얼로 많은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밴드 공모전에 나가 본다던가, 육상부 경기에 출전한다던가, 저 같은 신입사원이 큰 회의에서 발표를 한다던가. 그래서 그 앞에는 '도전'도 '시도'도 '시작'도 어울립니다.
'-하는'과 함께 올 수 있는 모든 말을 위한 여백이 마련된 이 카피는 비어서 풍족하네요.
제가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카피 테크닉의 추구미는 '천재적 생략'인데요, 이 카피가 그런 예시인 것 같습니다. 보는 순간 모두가 박수를 칠 만큼 과감하다던가 멋지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하지 않는 / 하는' 앞을 비워둔 덕분에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빈칸에 넣어볼 수 있다는 건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한 첫 장치가 되어줍니다. '순정'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리기까지 하는데, 카피에 그 이상 필요한 게 있을까요?
좋은 카피는 스테인리스 그릇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무엇이나 슥 담아볼 수 있을 만큼 널찍하지만 또 그만큼 튼튼한. 구조가 너무 완고해서 읽는 사람이 자기를 대입해 볼 여지가 없으면 공감하기가 어려울 테고, 그렇다고 너무 널널한 말을 해서야 누구한테나 하나 마나 한 소리가 될 테니까요.
종종 그 비결은 생략에 있습니다. 앞에 올 목적어를 생략하자 '-하는'이 그대로 'Do'가 된 것처럼요.
어떤 카피들은 제품과 상관없이도 읽는 사람을 움직이는데, 그런 카피를 쓰는 라이터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일단 뭐 하나라도 더 해보는 순정을 가져야겠죠. 창피함이야 남일처럼 여기는 용기와 뻔뻔함에 힘입어, 열혈 바보처럼요.
카피가 카피라이터를 북돋울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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