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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 백

불안과 권태 (단편소설)

by 바카롱

연극 강사가 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과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주 예고했던 무대에 올릴 작품연습에 대한 안내였다.

첫째, 독백이 가능한 이야기,

둘째, 불안과 권태에 관한 경험,

셋째, 5분 내외의 분량입니다.



불안과 권태, 둘 다 익숙한 단어지만, 누군가의 입을 통해 동시에 듣는 것은 쉽지않다. 그러나 서희에겐 처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20대 연인, 수인이 떠올랐다.

‘서희야, 불안과 권태는 결국 한 커플이야.’ 수인이 한 말이었다.

그때 서희는 손톱을 뜯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불안과 권태가 한 짝이라고?’ 손톱 뜯는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

수인의 잘생긴 외모와 뜬금없이 정리하는 듯한 말투에 서희는 늘 매혹당했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은 지루하거나 고약하거나, 둘 중 하나.’ 이십 대의 자신이 늘 달고 사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강사가 숨을 돌리느라 말을 멈추자 실내가 순간 적막해졌다. 강사가 회원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때 총무 김 선생이 입을 뗐다.

“선생님, 저희 이제 겨우 독백연습 시작인데.” 고위직 공무원이었다는 그는 모든 말이 느리고 진지했다. 회원들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리거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그래서 필요한 연습이에요.”느린 말에 섞인 불만을 알아챈 강사가 김 선생의 입을 다물게 했다.



강사가 양쪽을 훑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궁금한 게 많으시죠?”

“네에~” 회원 전원이 입을 모아 답했다. 하나의 목소리로 답하는 통에 서희는 수인의 기억을 떠올리다 말았다.

“자, 그런데요.” 강사가 빙그레 웃으며 잠시 쉬다 말을 이었다.

“제가 두 가지를 아직 덧붙이지 않아서 그래요.”

“넷째가 기한인데요. 먼저 마치신 분은 미리 주셔도 상관없지만, 기한은 이달 말일까지 예요. 아직 시간이 많다는 얘기죠. 그리고 마지막은 글솜씨.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완성도 있는 글을 써오시라는 건 아닙니다. 남에게 해주고 싶은 나의 이야기를 정리하신다 생각하세요.” 강사가 말을 끝내고 한껏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세웠다.



궁금증이 덜 풀린 사람들이 다른 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강사가 더 이어 설명했다.

“네, 그 글은 저만 봐요. 여러분이 독백 발표하실 때 제가 참고만 할 거예요.”

“그럼, 독백을 집에서 연습하고 말한 걸 간단히 정리하라?” 강 선생이 혼잣말을 했다.

“맞아요. 살면서 불안했던 경험이나 지금 불안한 내 속마음, 지겹고 권태로웠던 오래전 이야기나 상황 뭐, 그런 걸 친구에게 말하듯이 해보는 거죠.”

침묵이 메운 공간의 어색함을 느낀 강사가 두 손을 모아 무릎사이에 끼우며 말을 이었다.

“친구를 앞에 두고 수다를 떨어본다, 생각하세요. 독백이거든요. 거기에 감정을 넣어 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다음에 천천히 해나갈 거예요.”



‘그거 알어? 넌 모든 말을 독백하듯 한다.’ 수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내가 그래?’ 서희는 수인의 뜬금없는 지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희의 대꾸에 괘념치 않은 수인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다로 나가는 수인을 지켜보며 서희는 자신의 성숙하지 않은 몸이 부끄러워 타올을 젖히지 않았다.



그 오래전 종암동 대학가 카페 희랍에서 수인과 서희는 책을 읽거나 노래를 흥얼거렸지만, 수인을 의식한 서희는 책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인은 서희를 사랑하지 않았다. 서희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에 딱히 거부만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서희는 그걸 늘 의식했고 그래서 불안했다.

얼마 뒤 수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고백했다.

'난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서희는 시야가 검었다가 하얗게 변하는 믿기지 않는 세상을 보았다. 서희의 눈동자가 정지된 채 수인의 어깨너머를 응시했다.

‘서희야, 서희야!’ 서희는 자신의 이름이 허공에서 윙윙거리는 것을, 잠시 후에 알았다. 수인이 하는 말이 귀에는 들렸지만, 소리가 아닌 전파같이 느껴졌다.

수인이 서희의 잔을 치우며 제지했지만, 서희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거 집착이야. 일어나야지. 자, 이제 집으로 가자, 서희야. 데려다줄게.’



잠잠해진 틈을 타 강사가 프린트를 돌렸다. 종이를 받은 회원들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서희도 안경을 꺼냈다. 몇 사람이 유인물을 받자마자 강사 곁으로 가 질문을 했다. 그러자 늦어진 시작을 염두에 둔 강사가 핸드폰과 벽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네, 맞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좋죠.”

모두의 질문엔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네네, 바로 그거예요.’”

“모두가 맞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시면. 네네.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고, 상대를 가정해 보세요.” 앞줄에 앉은 서희에게 강사의 대답이 잘 들렸다. 재차 같은 말을 한 강사의 목소리에 귀찮은 티가 드러났다.

눈치 없기로 유명한 미숙이 또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무 얘기나 상관없어요, 어머니 살아오신 옛날 일 중에 하나!”

강사가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 그만요.”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단호했다. 서희는 자리로 돌아가는 미숙이 안쓰러워 종이에 코를 박았다.

미숙은 수업에 적극적이나 이해가 느린 편이고 동작도 굼떴다. 최고령이 아닌데도 원체 느려 같은 팀이 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간식을 자주 사고 타인의 입지를 세워주는 성품 덕에 아무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 자, 이 연습을 안 하면 큰일 날까요? 아녜요. 안 해도 큰일 절대, 안 나요. 난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럼, 안 하셔도 돼요. 해온 사람 이야기 중 하나로 연습할 대본을 만들 거예요.”

갑자기 적막해졌다. 모두가 강사의 마음에 동감하고 있었다.

프린트물 내용은 첫날 받았던 교재의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 그대로였다. 강사가 손뼉을 두 번 치며 집중을 요구했다.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꾸준한 연습만이 실력이 되는 거겠죠?” 강사가 마음을 진정하고 활기차게 물었다.

“네!” 평소 추임새가 좋은 여자가 큰 소리로 답했다.

“오! 좋습니다.” 여자와 강사가 서로 눈을 찡긋하며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오늘 수업으로 들어가야겠죠. 먼저 가셔야 한다는 총무님 사정으로 먼저 과제 설명드렸으니, 자 이제 모두 자리에 앉아주세요.”



무대 앞에 모였던 회원들이 제 자리로 가 앉았다.

“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호흡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강사가 목을 길게 뽑으며 수업이 시작되었다. 늘 하던 대로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쉬며 수업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요가를 하듯 시작하는 수업 방식이 낯설었으나 이제는 모두가 익숙했다. 호흡뿐 아니라 몸을 이완시키는 동작들도 이제는 익숙해져 강사를 따라 천천히 몸을 늘리고 숨을 쉬었다.

“몸이 변하고 있어요. 천천히!” 강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몸동작 만으로도 한 시간 수업이 되는 과정들을 지나왔다. 최근엔 수업 전에 제자리에서 몸을 이완시키며 시간을 보내는 회원들이 보였다.

준비 운동을 마치자 모두가 개운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모두 자리에 앉는 사이 강사가 의자 하나를 강의실 앞 가운데로 가져다 놓았다.



“이 줄에 계신 분 모두 일어나세요.”

창가 첫 세로줄의 다섯 사람이 일어나 강사가 이끄는 대로 의자 옆으로 섰다. 그중 맨 앞의 여자를 의자에 앉게 했다.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회원들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강사가 몸을 틀어 앞 칠판을 가리키며 앉은 이에게 지시했다.

“자, 오늘의 주제를 다 같이 보실까요? 선생님, 큰 소리로 읽어주세요.”

“상대를 납득시켜라!”

“자, 이제 설명드릴게요. 앉아계신 분을 강제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납득하고 일어나야만 하는 상황을 상상하고 말을 건네 보는 거예요. 납득이 되시면, 앉아계셨던 분은 일어나서 맨 뒤로 가 서주시고요. 말씀하신 분이 앉아서 다음 분이 제시하는 상황을 기다리는 겁니다.”

뒤편에서 아하! 누군가 작게 소리 냈다.



바로 뒤에 섰던 여자가 얼른 생각이 나는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사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명연자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말한 여자가 웃느라 제 말끝을 흐렸다.

“아이디어 좋았어요. 간호사시잖아요. 간호사가 말하다 웃나요? 웃지도 입 가리지도 마시고 실감 나게, 한번 더 해보실까요?” 강사가 정색하며 말했다. 지시어를 말한 여자도 그제야 마음을 먹은 듯 얼굴의 웃음기를 거뒀다.

“명연자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그녀가 차트를 보는 간호사 흉내를 내며 심드렁하고 사무적으로 말을 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앉아있던 이가 일어났다.



‘자, 천천히 일어나 볼까요?’

의사에 말에 힘을 주며 일어서던 남편의 생전모습이 서희의 머리에 떠오르다 사라졌다.



뒷사람도 첫 사람의 말에 쉽게 힌트를 얻은 듯했다. 칠판 뒤로 세 걸음 가더니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번호표 123번 고객님, 6번 창구로 오십시오.” 제법 그럴듯한 목소리에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앉아 있어요. 계산하고 올 테니까. 서희가 의자에 앉은 남편이 걱정되어 동동걸음 하던 과거가 떠올랐다. 사라진 남편을 찾아 혼비백산했던 소동도 떠올랐다.

어디 가지 마. 절대! 여기 그대로 있어야 돼.



미션을 마친 이도 일어나 뒤로 가 섰다. 은행원을 흉내 냈던 여자가 자리에 앉았다. 다음 사람이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며 앉은 이의 어깨 아래로 고개를 디밀었다.

“저 여기, 제 자리 같은데요. 좌석번호 확인하신 걸까요?” 조심스럽게 말하자, 앉은 이도 자기 주머니를 뒤지며 확인하는 모습을 흉내냈다.

“아이쿠, 죄송해요. 눈이 어두워서 잘못 봤어요. 늙으면 죽어야 해. 눈도 안 보이고.” 혼잣말에 모두가 웃었다.

“안경을 쓰면 되죠. 죽기도 쉽지 않아요.” 말하기 좋아하는 남자, 강 선생이 멀리서 한 마디 던졌다.

서희가 모처럼 미소를 띠었다.

막내 영은이 양손에 무언가 든 시늉을 하며 말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주문하신 치킨 두 마리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며 건네는 시늉을 했다.

“냄새가 좋은데요.” 일어선 사람이 웃으며 카드 내미는 동작을 하고 뒤로 나갔다.



막내 영은이 자리에 앉고 강 선생의 순서가 되었다. 그가 뒷걸음 하더니 뛰어오는 시늉을 했다.

“영은 씨 이럴 때가 아니야” 앉아 있는 영은이 강 선생의 얼굴 연기에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영은 씨, 웃을 때가 아니라구. 그놈들이 오고 있다고.”

“그놈들?”은영도 맞장구를 쳤다.

“누군가 우리를 밀고한 게 틀림없어. 어서 빠져 나가자구.” 강 선생이 영은의 팔을 붙잡았다. 일어선 영은의 어깨를 감싸 안는 시늉을 하며 강의실 뒤쪽으로 재빠르게 걸었다.

강사가 그들을 바라보며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 총무 김 선생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강사 앞으로 걸어 나왔다. 강사가 건성 목례를 했다. 문 앞에서 다시 죄송하다는 김 선생의 말에 강사가 떼던 입을 다물었다. 모두 문 쪽을 보며 완전히 닫힐 때를 기다렸다.

“다음에 사정 있으신 분은 그냥 조용히 가셔도 됩니다.” 강사가 콧등을 찡긋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강 선생이 앉고 첫 여자 명 선생의 차례가 되었다.

“자, 이어가 볼까요?” 강사가 큐 사인을 주었다.

“자기야 게이트로 가자. 우리가 탈 비행기 안내 방송 나오는데. 로마행 여덟 시 오십 분 맞지?” 명 선생이 강백호에게 찡긋 웃었다. 그 둘이 팔짱을 끼고 캐리어를 끄는 동작을 했다. 선글라스를 올리듯 콧등을 밀며 턱을 치켜들자 회원들 모두 박수를 보냈다.

“자, 그럼 과제 설명으로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잠시 쉬겠습니다.”



강 선생, 강백호는 평소 장난기가 많아 여자 회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의 재치 있는 농담 덕에 긴장이 풀리고 재미가 더하는 날이 많았다. 말이 느린 김 선생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이었다.

“아니, 미애 씨는 언제쯤 돼야 한국에 나오는 거야?” 제일 연장자인 경란이 손에 방울토마토를 들고 강 선생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방울토마토에 손을 뻗는 이들로 모두 강백호를 향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둘러앉았다.

“글쎄요. 아직도 제 엄마 손이 필요하다니 도리가 없어요.” 강 선생이 덤덤히 대답했다.

“미국으로 시집갔으면 미국식으로 키우지 제 엄마 손은 왜 빌린데.”

“남이 필요할 때까지가 사는 것도 복인 거예요.”한 여자가 반박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때가 좋지. 미애 씨 좋으면 된 거야.”

미숙 씨가 맞장구를 쳤다.



서희는 마지막 해 남편을 침대에 뉠 때마다 자신에게 다독였던 말이 생각났다.

사랑이 담긴 수고가 행복이야!

스스로에게 말하며 믿으려 애썼다.

하지만, 남편은 착하기만 할 뿐 마음의 고저가 없는 사람이었다. 서희의 마음이 온전히 이해되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마음의 변주가 적어 그 파동도 적은 사람, 남편의 마음이 서희에게 물결치듯 다가선 적이 없다는 생각으로 삼십 년이 넘게 부부로 살아왔다. 그러던 그가 치매 환자가 되었을 때 서희는 통곡했다. 마음이 닿아보지도 못한 채 부부로의 인연이 끝났다니! 그가 사라진 후에 그에 대해 무엇을 알았던가 의아했다.

잠시 후 자신의 차례가 올까 조바심이 일었고, 남편의 생전모습에 아이디어가 살아나다 도망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십오 분 뒤 수업이 다시 시작됐다.

“오늘은 납득의 기술로 수업을 시작했는데요. 명확한 목표로 상대를 납득시켜 움직이게 하는 게 핵심이었죠. 다들 간단한 말로 상대를 일어나게 하라! 다들 잘 해내셨어요.”



어디가? 어디 가는 거야? 남편은 서희의 차림엔 여지없이 민감하게 굴었다.

일어나요. 병원 가야지.

어디?

병원.

병원? 누가 아파?

남편을 일으킬 때마다 그를 납득시키기가 어려웠던 과거가 떠올랐다.

쳇바퀴 돌리듯 한없이 되풀이했던 남편과의 마지막 일 년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아 서희가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미간을 좁혔다.



“이어서 하겠습니다. 두 번째 줄 모두 앞으로 나오세요.” 서희의 옆줄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김 선생이 빠진 네 명의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첫째 줄의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말들이 이어 나왔다.

“버스 온다. 일어나.” 멋쟁이 한여사가 말했다.

“옥분아, 할머니께 자리 양보해야지.” 옥분 씨가 일어나자 정희 씨가 미소 지으며 스스로 만족해했다.

“저기요, 아까 지갑 흘리셨어요. 저쪽에요.” 경란이 재차 저쪽이라 가리키며 몸을 크게 움직이고 정희 씨가 어머! 를 외치며 지갑 줍는 연기를 하자 강사가 흡족한 미소를 보냈다.

“이제 저희 팀 순서예요. 무대 뒤로 가서 대기하래요.” 말을 건네며 빨리 가자고 부추기는 자세가 자연스러워 보는 이들이 작은 박수소리를 냈다.

모두 대꾸 없이 일어서는 바람에 첫 줄보다 아주 빠르게 끝이 났다. 서희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좀.

어디 가는 거야?

일어나라구, 제발!

서희가 애원하다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다 지친 서희가 눈을 훔치고 아기를 달래듯 말했다.

나랑 좋은 데 놀러 가자.

좋은데?

어디가?

응. 좋은데 소풍가자.

아이처럼 웃으며 일어서던 남편을 떠올리자, 목구멍에서 뜨거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서희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구민회관 연극반에 발을 처음 디뎠던 것은 남편의 병이 드러나기 전이었다. 아직도 그 첫날이 서희의 머릿속에 선명했다. 첫 수업 날 회원들의 면면이 기대되어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남편에게 점심거리를 설명하고 나서야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로션을 듬뿍 발라 눈에 띄게 깊어진 주름을 힘껏 문질렀다. 미소를 지어보며 가장 근사한 표정을 지어도 보았다. 볼 터치와 마스카라까지 한 서희는 미리 준비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이제는 볼품없어진 뒤태를 손거울로 살펴보고 가방을 들었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던 남편이 안방에서 걸어 나오는 서희를 힐끔 보더니 혼잣말을 했다.

“화장이 진하네. 몰라보겠어.”

서희는 눈을 흘겼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시니어들의 연극여행!’

구민회관 정문 안으로 벽 전체를 덮은 광고문구가 서희를 흥분시켰다. 검은 바탕에 골드 글씨와 은빛의 무대 조명을 디자인한 포스터가 맘에 들었다. 참가신청서를 내기 전에 오래 망설였던 것과는 달리 이미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퇴직 후 몇 달을 고민한 끝에 시작된 첫 번째 여정이었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가니 서희의 가슴이 뛰었다.



‘밥, 다 됐어. 티브이 끄고 식탁으로 와요.’

서희가 준비한 말이었다.

남편에게 매일 했던 의례적인 그 말은 소리로 바뀌었다가 나중엔 아예 사라졌다. 말이 소리로 변질되고 나중엔 침묵이 서희의 집을 메웠다. 무거운 침묵이 버거워 서희가 울음을 터트렸다.



바로 자신이 앉을 차례가 될 줄 알았으나 강사가 다시 의자에 앉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도 미션을 참, 잘하셨어요. 여러분도 다 느끼셨겠지만, 목표가 있는 대사를 던져서 상대를 납득시키는 것은 어렵지도 않고 연습도 필요하지 않아요”

일어설 채비를 했던 서희의 가슴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이번엔 ‘관계에서의 설득’를 생각해 볼 거예요.”

강사가 힘을 주어 말했다.

모두 책상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일방적 지시가 아니라 대화, 즉 상호작용을 할 거예요. 그럼, 말하고 듣는 사람 사이에 뭐가 전제되어야 할까요?”

질문을 던지고 강사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말이 없자 강사가 혼잣말을 했다.

“아까, 첫째 줄 연습 중에 뭔가 답이 나왔는데.”

그래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서희도 뭔가 느낌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려워요, 선생님.” 경란이 말하자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은행이나 병원에서 차례가 되어 일어나는 경우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아무런 관계가 없죠. 그런데 강백호 선생님이 하신 역할부터 좀 달라요. 사채업자 소식을 알리는 강백호 씨와 은영 씨의 관계를 상상하게 되지 않나요? 앞의 경우와 확실히 다르죠.”

“그러네요. 사채업자가 들이치는 자리에 같이 있는 것도 그렇고.” 경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어요, 부부예요. 자, 그럼 답이 뭘까요?”

“긴밀한 관계?” 영은이 작은 소리로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강사가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엄지와 중지로 딱! 소리를 냈다.

“정답! 다음 미션은 사적인 관계가 전제되는 거예요.”

“부부가 아니라 애인일 수도 있어요. 선생님.” 느닷없이 뒷북을 친 경란의 말에 강사가 멈칫하더니 크게 웃었다. 사람들도 따라 웃었고 강백호가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 이제 상대방의 반응을 봐가며 다음 말을 하는 연습을 해볼 겁니다. 그러자면 말뿐 아니라 표정, 동작, 톤 뭐 다 중요하죠. 한 마디로 일방적 지시가 아니고 사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만들어보겠습니다.”

몇몇 사람이 프린트물에 메모하는 모습을 보며 강사가 말했다.

“안 적으셔도 돼요. 첫날 드린 책자에 다 있어요.”

“자, 긴밀한 관계 또는 사적인 관계의 예를 들어볼까요?”

부부, 자매, 형제, 직장상사, 동료, 이웃, 선배, 동창, 여기저기서 답들이 쏟아졌다.

“자. 이해하셨으니 꼭 부부가 아니라도 되구요, 다들 부부를 제일 선호하시긴 해요. 미혼인 분들도 뭔지 아시죠?“ 영은과 눈이 마주친 강사가 눈을 찡긋했다.



강사가 자기 가방 속에서 작은 지퍼백에 담긴 글자카드를 꺼내고 말했다.

”자, 이제 앞뒤로 짝을 만드시고 두 분 중 한 분이 나오셔서 카드를 한 장씩 뽑을 건데요.”

극장, 식당, 버스, 바닷가, 수영장. 목욕탕, 공항, 침실, 재래시장, 카페, 산길, 고궁, 동창회 등 꽤 많은 장소카드가 눈에 띄었고 강사는 하나씩 글자카드를 보여주었다.

그 장소에 관계가 있는 인물들을 설정하고 갈등상황을 만들어 짧은 즉흥극을 하라는 미션이었다.


서희가 몸을 돌려 뒤에 앉은 여자과 짝이 되었다. 여자가 앞으로 나가 카드를 뽑아왔다.

‘식당’이었다. 서희가 흡족한 미소를 보였고 여자가 물었다.

“언제 남편이 제일 미우세요?”

“그냥 부부로 가는 거예요? 서희가 웃으며 물었다.

여자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웃었다.

“글쎄요.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서희는 웃음으로 남편의 부재를 감추고 말했다.

“저는 글쎄.” 여자가 인상을 쓰며 이어갔다.

“어딜 가나 그릇을 핥아먹을 듯이 싹싹 먹는 모습이 그렇게 싫고 창피해요.”

“잘 드시나 보죠.”

“아녜요. 돈이 아까워서. 젊어 못 먹어서.” 여자가 라임을 살리며 말하는 통에 서희가 크게 미소지었다.

“깨끗이 그릇 비워주는 거 식당에선 좋아할걸요.”

“그것도 적당해야지요, 창피하다니까요. 남들 다 일어나 갈 채비가 됐는데도 먹을 때가 있어요.”

팀마다 장소는 다 다른데 모두 남편들 얘기를 하고 있었다. 30대의 젊은 은영에게도 남편 성토에 열을 올리는 경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아버진 안 그랬어?” 일단 누구에게나 반말인 경란의 말버릇에 서희가 미간을 좁혔다. 어느새 강의실은 남편 성토의 장이 되었다. 우리 남편이랑 똑같아요.라는 반응에 박수와 웃음소리가 섞였다.



웃어봐.

어?

웃어 좀 보라구!

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집안을 메우는 것은 티브이 소리뿐이었다. 남편을 향해 소리치는 일이 흔해졌고 놀란 남편이 찌푸렸지만, 그조차 반응이 없어지기 시작했을 때 서희는 무너졌다. 해가 넘어가는 저녁 어스름한 거실은 쓸쓸했다. 생명을 잃은 고목처럼 미동없이 앉아 시간을 보내는 날이 계속되었다.

얼마 후 화장실에 선 채로 옷을 버린 남편을 본 서희가 바닥에 주저앉아 수건으로 입을 막고 통곡했다.



부부사별의 충격이 가장 큰 인생의 고통이라는 말은 대략 일 년을 넘어갔다. 단장한 서희를 보며 슬며시 웃던 남편의 모습이 집의 이곳저곳에서 불쑥 떠올랐다. 견딜 수 없는 날엔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종일 돌아다니다 돌아와 쓰러지고 잠들었다. 그 어떤 유희에도 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티브이를 켜놓으면 시공간이 분리된 곳에 자신이 놓여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적막한 새벽 시간은 길고도 막막했다. 첫 기제사를 지나고 몇 달 뒤 서희는 새벽 걷기를 시작했다. 살아있는 자식들을 위한 찬거리를 준비하며 서서히 이전의 삶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그즈음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나선 것은 구민회관이었고 서예와 같이 정적인 활동을 선택한 것은, 여전히 말하기가 싫어서였다. 두 해 가까이 지나니 실력이 꽤 늘었고 단체 전시 준비로 바빠지니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서희의 나이가 어느새 칠십을 넘어서고 있었다. 가족 모임조차 귀챦아하는 서희를 보자 딸들은 연극을 권했다.


나이 칠십에 연극은 무슨? 싫어.

안돼 엄마. 집에만 계시면 안 돼.

그럼, 그냥 서예 계속하지.

아니, 한 번 더 생각해 봐. 엄마!

엄마가 평생 노래를 했고 아빠 계실 때도 다녔던 기억을 해봐.

아빠 때문에 그만둔 거 억울하다고 얼마나 여러 번 말했었는데!


딸들의 성화에도 여간해선 마음이 반응하지 않았다. 성화에 짜증이 나기도 했다.

어느 날 지인들과의 구민회관 전시회에 온 서희는 전면에 걸린 안내광고를 보았다.

그림을 꾸준히 그리는 지인의 열정에 부러움이 일던 찰나였다.

‘인생의 두 번째 무대를 준비하세요! 시니어 연극팀에서 새로운 도전을!’

두 번째 무대! 실제의 인생과 다른 무대를 일컫겠지만, 서희에게 그 말이 달리 느껴졌다.

자신이 오래전 연극을 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세월이 십 년에 가깝다는 사실에 놀랐다. 딸들의 성화에도 추려보지 않았던 과거와 세월이 한 번에 의식되었다.


지인들이 전시장 안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이 서희는 대형 팜플렛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사무실에서 나오다 눈이 마주친 젊은 여자가 서희를 보고 말했다.

“도전하세요. 잘하실 거 같아요.” 서희가 동그랗게 눈을 떴고 미소를 지었다.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서희는 마감 시간까지 몇 번을 망설였다. 누가 봐도 서희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왁자지껄한 여자들의 부류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근데 넌 겉으로는 조용한데 내면에 뜨거운 뭔가가 있어. 뭔가 롱잉 하는 느낌 말이야.’

‘롱잉? 그게 뭔데?’

‘뭔가, 열망하는? 강렬함 같은? 소위 열정이라고 하지 않나?’

수인은 관념적인 단어와 영어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저 노래가사 생각해 보면 끔찍한 스토킹 가사야.’

수인이 웅얼거렸고, 서희는 가사를 되짚으며 내용을 헤아렸다.

종암동 대학가 ‘희랍’에는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Tak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수인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고백했다.

‘나,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수인이 하는 말이 서희에게는 아득히 멀리서 날아오는 전파같이 느껴졌다. 윙윙, 그의 말이 다시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서희가 술을 원샷으로 여러 번 들이켰다.

수인이 서희의 잔을 치우며 제지했지만, 서희는 말을 듣지 않았다.

‘너 그거 집착이야. 일어나야지. 자, 이제 집으로 가자, 서희야. 데려다줄게.’

집에 와 쓰러진 서희는 며칠을 일어나지 못했다.



식당에서 음식에 집착하는 여자의 남편을 소재로 간단한 대화를 만들어보는 동안 서희는 아무거나 잘 먹던 무던한 남편을 기억했다.

여기저기서 대사를 추리며 웃음이 쏟아졌다. 갈등상황이라고 해야 모두 하찮은 대사들이었다. 서희와 미영은 대사를 주고받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희가 남자목소리를 내자니 어색해 둘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자식 잘난 척하는 걸 뭐 하러 다 들어주냐?”

“당신은 명희한테 아직도 친절하던데.”

“빨리 사고 나와. 나는 그냥 저쪽 의자에 앉아 있을게.”

“무슨 소리야? 말이 돼? 지금 자기 옷 사러 온 건데 입어는 봐야 할 거 아냐?”

“빨리 나오지, 뭐 하는 거야?”

“어딘데?”

“어디긴 어디야? 목욕탕 앞이지. 난 그냥 집으로 먼저 갈게 알아서 와.”

“이제 들어왔는데 돌아나 보고 나가야지. 고궁의 가을 정취도 좀 느끼고 말야.”

여기저기서 익숙한 말들과 드라마에서 들어왔던 대사들이 섞이며 강의실은 시끌벅적해졌고 강사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상황을 만들고 대사의 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 제 남편을 고발하는 성토의 장이 되어갔다. 감정이 사실적이라 절로 현실감 있는 대사가 쏟아졌다.

강사가 손목시계를 힐끗 보더니 강백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강 선생 님, 지원군 없이 혼자 불편하시겠어요?”

“하하, 아닙니다. 요즘 안 사람 잔소리 그리웠는데, 오랜만에 들어보니 반가운걸요.”

“거 봐요, 남자는 다 똑같지 뭐.” 경란이 큰소리로 말했다.


수인은 달랐을까? 그는 섬세하고 민감했다. 만약 수인과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면 서희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명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오늘 진짜 열심히 하시는데요. 다들 작정하신 것 같아. 어느 팀이 한번 해볼까요?” 강사가 손뼉을 치며 시선을 집중시키자 명 선생이 일어나 강백호를 잡아끌었다. 모두 박수를 보내자 머쓱해진 강백호가 마지못해 앞으로 나왔다.


명 선생이 앞쪽 문에 자신을 비추며 대사를 시작했다. 딴청하듯 주위를 돌아보던 강백호가 대사를 맛깔나게 받아치며 그럴듯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아내 : 이거 봐 봐, 이 색 괜찮지 않아? 너무 튀지도 않고.

남편 : 응, 그러네.

아내 : 보여주는 것마다 그러네, 라니? 잘 좀 봐봐.

남편 : 응 다 어울려. 근데 아까 거랑 비슷한데.

아내 : 아니, 뭐가 비슷해? 달라, 목 부분이 다르잖아. 내 나이엔 이게 은근히 중요해.

남편 : 그래? 그럼 그걸로 사. 난 잠깐 저쪽 의자에 앉아 있을게.

아내 : 아니 아니, 잠깐만! 입어본 게 없는데 벌써 앉으러 간다구?

남편 : 당신은 옷 고를 때, 한참 걸리잖아. 그냥 편한 거나 하나 사지.

아내 : 편한 거나? 아니 남의 잔치 가는데, 편한 걸 입을 거면 여길 왜 와?

저 여자 좀 봐, 남편이 같이 봐주잖아.

남편 : 저기야 젊은 애들이쟎아.

강백호가 은영 쪽을 바라보며 듯 눈을 찡긋 웃었다.

아내 : 아니 늙으면? 봐주는 것도 힘들어?

남편 : 그냥 편하게 맘에 드는 거 고르면 되잖아. 왜 자꾸 싸우려 들어?

(경직된 아내는 거울 앞에서 옷을 대보고, 남편은 멀리 앉은 채 휴대폰을 본다.)

리얼한 그들의 연기에 모두 큰 박수를 보냈다.

서희는 연습도 없이 바로 그렇게 말을 맞추어간 그들에게 경이로움을 느꼈고 자신도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은근히 흥분이 되었다.



이거 입어? 남편은 서희가 하라는 대로 하고 군말이 없었다.

벗어요. 그거

이거?

응. 그건 어디갈 때 입는 거야.

이거?

응 그건 이제 벗고 저거 입어요.

이거 입어?

아니 벗으라고.

아무거나 입던 남편은 증상이 심해지자 집에서도 양복을 입으려 들었다. 서희와의 씨름은 정장을 모두 감추고 나서야 멈추게 되었다.


남편은 착한 사람이었다. 생전 옷에 대한 불만도, 음식에 대한 불만도 없는 참으로 무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인과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그 무던함이 가끔 지루할 때가 많았다. 서희 자신의 만족을 위해 늘 돌보고 챙겨야 했다.



“선생님, 남편과의 갈등은 장소 불문이에요.” 미숙의 말에 강사가 눈을 흘기며 장난스레 물었다.

“지금 상대 남편분들이 혹시 어떤 한 분 얘긴 아닌 거죠?”

모두 소리내어 웃었고 수업은 즐거운 인사말로 마무리되었다.

“다들 독백 연습 열심히 하시고 다음에 봬요.”



다음날부터 서희는 거울 앞에 앉아 세월을 더듬으며 혼잣말을 연습했다.

‘넌 모든 말을 독백하듯 한다.’

남편이 알아채지 못한 수인의 말이 맴돌았다.

나는 수인을 사랑했지만, 사실 그건 일방적인 사랑이었어.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고, 수인은 심드렁하게 그러던지! 하고 대꾸했었지.

수인의 조각같은 외모와 관념적인 언어들이 얼마나 가슴설레게 했는지.

(허공에 모습을 회상하고 미소 지으며)

내 옆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멀리 있는 듯했어.

그래서였을까?

난 항상 불안했어.

수인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아닌 걸 알고는 있었어. 그래도 사귀다 보면. 정이 들 거란 기대가 있었거든. 그 불안이 터진 건, 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어.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느낌. 참 이상하지? 진짜 육감이라는 게 있더라구.

거짓말이 뭐였는지 궁금하다구?(작게 웃으며)

어느 날,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는데,

친구들과 있어서 어렵겠다고 하더라구.

그런데 말이야, 신기하게도 그게 사실이 아닐 거란 느낌이 오더라구. 별다른 증거도 없었는데 그냥 직감이었어.

그가 혹시 박승아, 그 ‘희랍’의 여주인에게 간 게 아닐까. 의심이 피어올랐지.

(깊게 숨을 내쉬며)

그 카페 여주인은 우리보다 몇 살은 더 많은 여자였는데 신비하고 아름다웠어. 그건 사실이야.

그녀를 향한 대학생들의 구애소동이 꽤 많았어. 그도 그중 하나였던 거야.

버스를 타고 종암동으로 가는 동안, 혹시 그가 이미 그녀에게 고백이라도 한 건 아닐까 마음이 조마조마했어.

‘희랍’의 문을 열었을 때, 검은 보들레르 사진 옆에 수인이 홀로 앉아 있었어.

그 집은 조명도 어둡고, 검은 옷차림의 주인과 길게 드리운 휘장들 때문에 늘 검은 동굴같았지.

그 공간이 문득 아득하고 무섭게 느껴져, 나는 황급히 문을 닫고 나왔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숨)

그때 알았지. 드디어 올 것이 오고 있구나, 하고.

(한 참을 쉬고)


며칠 뒤, 그가 고백했어.

“널 좋아하지 않아. 사랑은 더더욱 아니야.”

시야가 하얗게 바뀌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공허한 표정으로)

불안이 실체를 드러냈던 순간이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스물 세살 무렵의 나는 정말 뭐랄까… (허공을 바라보며)

그 나이의 나는 무엇을 그토록 찾았던 걸까?

지금도 모르겠어.

방황하고 비척이는 젊은이들을 보면 그때의 내가 보여. 이 십 대의 나는 실체도 없는 불안에 늘 잠식되어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렇게 점차 헤어짐을 받아들였지 뭐. 어쩌겠어?


남편과의 시간은 달랐지.

조건이 맞아 소개로 만나, 의례적인 데이트를 거쳐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웠어.

근데 말이야, 매일은 분주했지만, 마음은 늘 권태로웠어.

뭔가 실체를 알 수 없는 갈망이 있었지만,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알려고 하기에도 현실이 벅찼던 것 같아.

남편의 말은 삼시세끼, 밥처럼 습관적이고, 나의 대답도 늘 의례적이었지.

남편은 무던했지만, 나를 사랑했다기보다 적당한 짝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

그게 늘 아쉬웠어. (고개를 끄덕이며) 늘 뜨뜻미지근한 관계 말이야.

마음이 이해되는 순간이 적어 늘 아쉽고 지루했어.

말은 이해된다고 해도, 생각이 이해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지.


그런데 말야, 그가 드디어 그 몹쓸 병에 걸려 자신을 의식하지도 못해 수발을 들다 보니, 권태가 다 뭐야? 그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는 게 버거웠지.

오랫동안 잡고 있었던 감정을 잊었던 것 같아. 아련한 사랑의 노래가사에도 마음을 줘본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세월이라니!

그리고 이제, 그도 내 곁에 없네. (가벼운 헛웃음)

그 둘 다 사라진 자리, 지금은 나 혼자야.

휴우! (깊은 한숨)

붙잡으려 했던 불안도, 견디려 했던 권태도,

결국, 아무것도 아닌 ‘지금’이 되어버렸어.

일주일 내내 서희는 집안 곳곳을 옮겨 다니며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수인과 남편을 떠올리자 지나간 세월이 꼬리를 물고 따라 나왔다. 말을 하는 사이 한숨을 쉬거나 고개를 쳐들어 멀리 바라보는 동작도 저절로 나타났다.


강사가 서희를 지목하며 말했다.

“오늘은 이번 줄부터 시작합니다.”

서희가 침을 꼴깍 한번 삼키고 앞자리 의자로 향했다.

강사가 무대 뒤편 형광등 하나만을 두고 모든 불을 껐을 때 서희가 앉은 의자 뒤로만 엷은 빛이 떨어졌다. 서희의 등 뒤 흐린 빛이 서희의 얼굴을 그늘지게 했다. 서희의 검은색 옷차림과 어두운 무대가 흑백사진처럼 느껴졌다.

강선생의 말이 들렸다.

“힘내십시요!”

순간, 뭐라는 거지? 서희가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멀리서 박수를 보내는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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