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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Jan 09. 2024

나름대로

그럴 수도!

얼마 전,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다면 의당!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작가의 글을 읽고 뜨끔한 적이 있었다. 쓴 글을 퇴고하는 시간이 쓰는 시간보다 길어야 한다는 취지의 대목에 이르러 부끄러움을 느꼈다. 발행 버튼을 누르고 바로 다시 한번 읽어보고도 찾지 못한 오자가 여러 날 뒤 발견된 적이 있다. 그 정도면 기본적인 태도를 지니지 못한 것이니 말해 무엇하랴! 화끈거렸다. 주어에 맞지 않는 서술어에 뜨끔한 적도 있다. 반복된 형용사나 부사어에 황급했던 적도 있다.

 

이른 아침 그때의 민망함과 어두워지는 시력을 떠올리다가 나의 글 "틀림없이 이뻐지실 거예요"를 다시 읽어 보았다. 세 곳의 문장을 다듬어 수정했다. 그때는 무엇에 취해 그렇게 쓰고도 흡족하고 말았을까? 잠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크게 자책한 것은 아니다. 그럴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더러 뭐든 대충 하는 습관이 내게 있음을 고백하기도 하지만 위안으로 삼기도 한다.


글을 수정하다가 그때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다시,

 속 색연필을 끼워 다니던, 머리숱을 걱정하던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다. 틀림없이 이뻐지실 거라고 건넨 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친구를 만나 새로 한 머리는 흡족했었을까? 그녀가 들먹였던 도곡동탓에 떠올랐던 타워팰리스의 동창도 궁금하다. 최근에 동창의 카톡 프사 사진이 수십 장에서 딱 한 장으로 바뀐 것을 알게 되었다. 왜 한 장 만을 남겨놓았는지 그 심경의 변화가 궁금하다. 사진과 함께 실었던 마음이나 기억의 잔상이 있어 특별한 다짐이 있어야 모조리 지울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해외 여러 곳의 멋진 배경에 우아하게 비껴선 그녀의 긴 모습, 어딘가 귀티가 흐르던 아들, 딸들의 미국의 졸업식이나 구릿빛의 피부들로 메워진 에너지 넘치는 운동모습들은 다 사라졌다. 별거 아닌 소파의 쿠션사진을 프사에 올려놓은 마음이 사뭇 궁금하다.


나는 사뭇을 자주 사용하는 편인 것 같다. '사뭇'이라는 단어사용과 머리를 갸웃하는 행동을 여전히 하고 있다.


사뭇 궁금한 것

사뭇 의아한 것

사뭇 사랑스러운 것

사뭇 감동적인 것

사뭇!

말 그대로 딴 판인 것


사뭇이라는 단어는 원래 '딴판으로'라는 뜻이다. 보기에 영락없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들과 사뭇 딴판인 것들의 조화가 이채롭다. 그래서 실수도 하고 그래서 납득도 되는 신기한 일이다. 그 간극이 내겐 제법 진지하다.


가장 흥미로운 세상의 모습이다. 사뭇에 가장 어울리는 건 역시 사람이다.


나는 타인들의 모습보기를 좋아한다. 미용실에 마주했었던 단발머리 그녀도 그랬을까? 거기에 스스럼없는 덕담까지! 옷차림의 선택, 다양한 취향에 보여지는 의도를 떠올리고 내 나름대로 해석하는 일이 재미있다. 타고난 얼굴생김새, 표정, 말투, 손동작, 걸음새와 같은 신체적 외양들도 하나같이 흥미롭다. 지인 중 하나는 그것은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이라고 치켜세워주기도 한다. 사실 어떤 의식과정 없이  빠르게 눈에 들어온다. 특히 손가락의 생김새를 자세히 묘사하며 나의 취향을 말하면 "그걸 언제 보셨어요?"라고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묻기도 한다. 사람들은 내가 본 것을 왜 보지 못했을까? 의아한 적도 있다.


먼 타지의 여행지에서 길로 나 앉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아무런 제재 없이 쳐다보며 느긋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유적지를 찾아 설명서를 읽는 일보다 내겐 즐겁다.



이렇게 예전의 글을 수정하다가 내 머릿속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려본 것은 뭘 써야 할까? 에 대한 고민에 맞닿아 있다. 젊은 시절에 나는 글을 쓰는 작가를 희망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설이었는데 내 꿈과는 요원하게 별 노력도 구체적 진전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당시 내가 고민? 한 것은 (내 짧은 공부와 생각의 한계 탓이겠지만) 아무리 거듭 생각해도 내겐 이래야 옳고 저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아무 곳에도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의당,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은 뭘까가 항상 답을 찾지 못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그럴 수도! 를 떠올리기도 혼자 나긋이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죄에 눈감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해되지 않는 심보 상사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지 않고 반발하는 모습이 있기도 한다. 시민의식이란 이런 행동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라 부르짖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의당 마땅히! 에 답을 찾지 못한다.

작가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글로 제안하신 분의 글이 모두 마음에 와닿고 이해되면서도 정작 나 스스로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다.



뭘 어떻게 써야 할까?

거기에 답해보려 애쓰지만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의 사고는 매우 많은 뉴런이 복잡하게 연결된 네트워크 안을 무수한 전기신호가 끊임없이 날아다니고 있어서라고 한다. 내 사고에 관여하는 뇌의 전자신호 움직임은 왜 이것이어야 했을까? 누군가처럼 왜라던가? 무엇을? 어떻게?라는 답을 찾지 못하는 걸까? 내 머릿속 전자신호들은 여전히 뉴런의 이곳저곳에 남긴 사진이나 그림을 해석하며 부유하고 있는가 보다.


사뭇 궁금한 것

사뭇 의아한 것

사뭇 사랑스러운 것

사뭇 감동적인 것


사뭇!

말 그대로 딴 판인 것들을 글로 써보자.


그와 함께 의당, 마땅히 에 응해야 하는 답이 부족하면 말하자.


그럴 수도! 그럴 리가! 그래봤자! 뭐.

나는 나 나름대로 그냥 가기로 한다.

나름대로! 나름대로라는 말속에 담긴 세상 모든 것의 이름들과 사연을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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