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어떻게 되셨어?" 이웃한 벤치에 앉은 나에게 건네는 노인의 첫마디다. 처음 보는 낯선 이의 나이를 묻는 것은 "내 인생 이야기 좀 들어볼래요?"의 다른 말이다. 보아하니 나보단 젊지만 너도 인생을 살만큼 살아서 내 이야기를 들을 채비가 된 것 같다는 의중이 담겨있다.
"아! 그려요. 좋을 때여. 어디 아픈데 없음, 젤로 좋을 때여"
그렇게 강가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녀와 나는 말 벗이 된다. 그녀의 일방적인 얘기를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엔 별 할 일이 없지만 싫지 않다.
처음 만난 여자가 자신이 살아온 우여곡절을 펼쳐놓는다. 이야기 전개가 여느 드라마만큼 재미있다. 이기적인 시동생과 얄미운 시누이, 분별없는 시어머니 그리고 무능한 남편들이 들고 나며 그녀의 지난한 시집살이가 펼쳐진다.
사랑과 배반을 동반한 이야기 속에 배다른 이복형제들 이야기가 가지 쳐지고 그 얼개를 짜 맞추느라 머릿속에 계보를 그려간다.
이야기에 푹 빠져 주름진 노인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 또래 할머니 한 분이 가까이 다가온다.
" 아이고 나오셨어? 지금 막 우리 시동생 돈 떼먹은 얘기 하던 중이여." 다가오는 할머니를 발견한 노인이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한다.
" 일찍 나오셨네. 벌써 다녀오시는 길이야?"
" 아이고 출발도 안 했어. 오늘 아침을 늦게 먹었어. 입맛이 영 없어. 관인댁 기다리다가 이 아줌마 하고 얘기하고 있었지. 지난번 얘기했잖아 왜. 얼굴 반반한 시동생 " 이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다른 할머니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한다.
"못 보던 모자네" 시동생 이야기를 이어갈 것 같았던 할머니께서 관인댁의 모자에 눈길을 준다.
"딸이 사줬어요."
"이쁘네. 색도 곱고."
"써볼라우?"
"써보고 맘에 들면 넘길 건가? 발그레한 볼에 웃음이 어린다.
"어디 줘 봐. 나도 이런 게 하나 있었으면 싶더라구. 워뗘? 어울려요?"
다시 내게 눈길을 주며 묻는다. 젊은 사람이 잘 볼 거 같다고 덧붙이신다.
"네, 어울리세요."
"얼마나 하나?"
"값은 안 물어봤는데, 하나 더 사다 줄 수 있는지 알아봐 줘요?"
모자 주인, 관인댁에 건네주며 실제로 살 맘이 있으신지 덧붙인다.
"딸이 어디서 샀는지 말해주면 내가 가서 사지 뭐."
"물어보고, 사다 줄 수 있음 사다 달라고 할게요. 다리도 성치 않은데. 다리는 어때요?"
"엊그제보다는 훨씬 나은 거 같여. 근데 입맛은 영 안 돌아오네. 약이 쎈가? 입이 쓰기만 하고 뭘 못 먹겠어"
몸에 관해 반복되는 통증과 약에 관한 이야기는 어제 오늘일이 아닌지 응수하지 않는다.
"그럼 오늘은 정자까지 걸어갔다 옵시다."
"아이고! 그럽시다. 의사선생이 자꾸 걸어야 한다니께"
내 나이를 물었던 노인은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힘을 주어 일어선다.
" 아줌마도 잘 가고 담에 또 봐요."
두 분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이천만 원을 떼어먹고 갚지 않는 시동생에 대한 후일담이 궁금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시동생은 그 집을 스러지게 만든 원흉이며 자신의 자식들도 건사하지 못한 칠푼이었다. 시어머니가 물려주신 땅을 어떻게 배분했는지 뭐든 아는 척인 시누남편은 어떻게 관여했는지 시동생의 배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사뭇 궁금하지만 한 편으로는 뻔한 결말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낯선이에게 가감없이 털어놓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얘기해야 풀릴 화가 가슴에 가득한걸까?
원망스런 시동생에서 모자로 쉽게 옮겨간 걸 보면 원망과 회한은 희미해졌음이 틀림없다. 수없이 반복해서 그려졌을 남편과 시집식구들은 그 횟수만큼 바래고 바래서 고약한 감정은 7시 일일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 수준일것이다.
"올 해 어떻게 되셨어?"
"길고 긴 내 이야기 좀 들어 볼라우?" 의 다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