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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Jan 03. 2024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봐도

이른 새벽 커피를 내린다. 그것은 일종의 리튜얼이다.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스스로에게 알리고 다시 시작해도 된다고 말한다.

어제까지 보다 이제 오늘부터가 더 중요한 거라고 다독인다.

아직은 시간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한 모금 한 모금에 일상의 기억을 소환한다.


언제나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나의 일상 모든 곳에 가까이 한 당신을 늘 그리워하며 눈길을 주고 이른 새벽 커피와 함께 마주하고 싶었다.

오늘도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당신을 기다린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요


오래전 노래가사처럼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린다.

내게 곁을 준 적도 있는 당신, 나를 위로한 적도 있는 당신은 늘 일정 거리를 두고 내 주변만을 맴돈다.

그대를 향한 갈망도 이제는 긴 세월에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그리움조차 이젠 기억으로 추억한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요


운동 후 둘러앉은 여자들의 호기 있는 웃음소리

목을 적시며 적당히 맞장구친 험담

남미의 끈적한 음악에 맞춰 흔든 골반

빠른 템포의 음악에 흉내 낸 20대 기분

각기 다른 춤사위, 부러움과 만만함의 조화

얼굴 주름에 깃든 생각지 못한 지혜

각기 다른 여자들의 표정과 그 사랑스러움

나와 같거나 딴 판인 정치판에 대한 신념과 호소

길동무를 하자며 건네는 산티아고 길과 로마에 대한 열정 어린 추억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에 이르는 딸들의 소식과 염려

부주의한 동거인의 생활태도에 오르내리는 혈압과 자제하려는 지적질

며칠 쨰 굴러다니는 어느 감독의 책

인사를 건네고 답장을 기다리는 소심함

누구나 해 봄직한 명소 앞 사진 찍기

지나가는 행인과 버스에 마주한 그 또는 그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움츠린 어깨

생각지도 못한 행동과 말투의 남의 집 아이들

나의 안녕을 기도해 주는 고마운 지인들과 제자들

흐린 하늘과 아쉬운 햇살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하늘의 구름

겨울에 만개한 선인장 꽃에 대한 감탄

느닷없이 떠오른 나의 소녀시대 어문각 출판사의 SF

좋아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영화배우들과 멋진 자태

먼 거리 비디오가게를 뒤져 본 제레미 아이언스의 모든 영화들

매번 정기적인 만남을 주선하려는 동기와 한 번도 성사되지 않은 여행계획

혼자서 김장을 해서 나눠주시는 팔순을 넘긴 우리 엄마

단답형의 말버릇을 가진 친구에게서 받는 당혹감

의례적인 새해인사와 질리지 않은 다정함

주변의 맛집과 그 열정적인 식탐의 현장들

낯선 여행지에서 겪은 우여곡절

호텔 문고리에 걸린 낯선 글씨와 쵸콜렛

가방을 꾸리고 시작되는 여행자의 기분

몇 년째 책상 위에 한자리하는 프랑스어 기초책

빈자리 찾아 올라가는 철근과 가려지는 시야

한 두어 층 더 높았다면! 상상하는 나의 욕망

과식에 대한 자책과 그 미련한 반복

형용사와 명사 어디쯤 머뭇거리는 자판 위 내 손가락

새로 장만한 컴퓨터와 새 키보드의 또각거리는 소리

몇 십 년 전 전쟁통 이야기에 내려앉는 눈꺼풀

남 허물 말하는 이와의 불편한 눈맞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악스런 친척들 소식

어머니를 통해 듣는 세월과 맞바꾼 원망과 회한의 사연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요


당신은 이런 나를 마주하고 있다가 아침 해에 홀연히 사라진다.

늘 그런 식인 당신을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조차 이제 희미하다.

일방적인 사랑이었을까?

사랑에는 무릇 짝사랑이란 이름이 있기도 하니까.


아니, 사랑도 아닌 착각이었을까?


여전히 당신을 생각한다.

그리움도 희미해져 버린 당신을 기다린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당신을 소환하는 일.

나의 하루의 시작! 그 리튜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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