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자메이카가 뭐야?”
“…응?”
“그게 뭐냐고?”
설마 넌, 지금, 자메이카가 나라 이름이라는 것도 모르는 중2?
학교에서 귀가하자마자 나를 보며 다짜고짜 따지듯이 묻는 아이의 물음에 짜증이 밀려왔다. 어려서부터 궁금한 것도 질문도 많았던 첫째 아이, 부모 된 도리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아이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려고 애썼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찾아서라도 알려줬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자라면서 스스로 궁금증을 해결해 나가고 사고의 폭을 넓히리라 믿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이 믿음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키를 엄마 아빠가 쥐고 있다고 믿는 거 같았다. 책을 읽다가도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큰 소리로 ”엄마, 이거 무슨 뜻이야? “ 문제집을 풀다가도 “아빠, 이거 어떻게 푸는 거야?” tv를 보다가도 “엄마, **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 사전, 인터넷, 책 등이 전부 쉽게 접근이 가능한 환경이건만 아이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엄마 아빠만 부르는 것이었다. 뭐 하러 수고롭게 인터넷 창을 열고 검색을 하거나 책을 펼쳐 보겠는가. ’엄마~‘면 웬만큼 다 해결이 되는데. ‘엄마’로 충분히 해결이 안 되면 ‘아빠’하고 부르면 보다 상세한 설명이 붙었다.
뭐든 궁금한 것을 입력하면 몇 분만에 빠른 속도로 답을 주는 챗gpt 같은 부모가 있는 한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탐구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에, 더 이상 인공지능 같은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겉모습은 얼추 영글어가는데 사고는 제자리에 머무는 듯한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다 보니 또 급발진을 한다.
”나도! 몰라!“
”왜 몰라?“
”그러는 너는? 왜 모르는데?“
”나야 안 배웠으니 모르지“
아이와 같은 수준으로 대답을 하니, 폭력에 가까운 답이 돌아온다.
“엄마는 알아야지. 나이도 많은데! 그것도 몰라?”
자신은 안 배워서 모른다 한다. 엄마나 선생님이 가르쳐준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것. 자신이 모르는 것은 어리기 때문에 배움이 적어서 그런 것이고, 나이가 많은 엄마는 배웠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상관없이 다 알아야 한다는 중2의 논리. 가뜩이나 요즘 논리의 비약이 심해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는데 ‘나이’ 운운하며 또다시 잔잔한 나의 오후를 뒤흔든다.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하던데... 이 아이는 작년부터 방문을 열고 나와 서는 뜬금없이 화두를 던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급히 결론을 유도하려 든다. 성품이 온화한 부모라면 부드럽게 달래 가며 아이의 말에 답을 하겠지만, 성미가 급하고 다소 예민한 나는 아이의 말투에 날이 선다. 이러니 제대로 된 대화가 이뤄지겠는가. 아이는 툴툴거리며 제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중 2나 된 아이가 ’자메이카‘가 뭔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모른다‘는 내 답을 진짜 ‘모른다’고 해석한 건지, 아니면 엄마의 무성의한 태도에 맞서 엄마를 ‘한방’ 먹이겠다는 의도였는지, 조소하는 듯한 아이의 표정에 내내 기분이 상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반응했으니, 아이가 적어도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서 자메이카를 알아보겠지 하는 기대감도 깔려 있었다.
다음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아이에게 ‘자메이카’에 대해 알게 됐냐고 물었다.
“어 애들이 알려주더라고. 나보고 ‘사회와 너무 단절돼서 사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
”애들이 어떻게 설명해 줬어? “
”응, 자메이카는 B**에서 나오는 치킨 이름이래“
”…….?“
”어제 학교 점심 메뉴에 자메이카 치킨이랑 불닭치킨 중 고르는 게 있었거든. 난 자메이카 치킨을 먹었는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하더라고“
‘자메이카 치킨’이라고 들어봤냐고 물어만 봤어도 그렇게 퉁명스럽게 ‘모른다’고 쏘아붙이며 대화의 품격을 떨어트리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가 물어본 자메이카가 그 자메이카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메이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아이가 물어보면 이번에는 대략적인 설명이라도 해줘야겠다 생각했는데, 아이는 ’자메이카라는 나라’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질문 덕에 나는 자메이카가 카리브해 지역에 위치한 섬나라이고 1655년에 영국이 점령하고 유럽인들이 이주하면서 흑인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됐다는 것, 우사인 볼트를 비롯한 많은 육상 선수들을 배출한 육상 강국이고, 이 나라 선수들의 유전자에는 단거리 선수에게 필요한 ‘액티넨 A’라는 유전자(근육의 순간적인 속도를 높여주는 유전자)가 다른 인종에 비해 많이 발견됐다는 내용 등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다.
그러나 나에게 ‘자메이카’를 물었던 중2 딸은 자메이카 치킨은 자메이카에서 유명한 치킨 조리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걸로 족하다 했다. 어떤 양념이 들어가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은 거 같았다.
나야말로 자메이카 치킨이 궁금해졌다. 인터넷 검색창에 자메이카 치킨의 유래, 저크 소스 등의 키워드를 입력했다. 자메이카의 토속 양념인 저크(jerk)로 재운 치킨으로 매운 고추와 여러 향신료로 재운 요리이며… 캐리비안 해적들이 바다로 나갈 때 치킨을 보관하기 위해 강한 향신료를 쓴 것에서 유래” 등등의 내용들을 접할 수 있었다.
세상은 넓고 치킨의 요리법은 정말 다양하구나!
나라 이름을 딴 음식 메뉴를 하나하나 접할 때마다 그 음식의 유래나 기원만 살펴봐도 따로 지리나 세계사 공부를 할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 딸은 또 ”엄마나 많이 알아보셔“ 라 하겠지.
배우지 않아서 모른다, 누가 가르쳐 줘야만 안다고 하는 중2 딸이 답답한 건, 내가 이제는 ‘옛날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