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인 딸의 친구 엄마를 만났다. 지난달에 보고 못 봤으니 근 한 달만이다. 전과 다름없이 쾌활하고 단정한 모습, 체구는 작지만 7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늘 ‘관리하는 여자’ 같다. 이제 아이들은 각자 친한 아이들이 생겨 학교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는 정도인 거 같지만 아이들과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육아 동지이자 친구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그간 못 나눈 얘기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오늘은 중학생인 아이들이 현장체험학습을 가는 날, 연년생 아이 둘을 챙기고 출근을 해야 했던 터라 정신없는 아침을 시작했다고 했다. 도시락을 준비해 주느라 바쁜 거였을까 싶어 물으니 뭘 챙겨 주느라 바빴던 것이 아니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와 기싸움하느라 에너지를 쏟은 모양이었다.
“날이 얼마나 더운데 그걸 입어?”
때 이른 무더위로 한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는 5월. 체험학습을 떠나는 아이들의 차림새는 대개 반팔에 반바지이지만 이 집 아이만은 반팔 티셔츠 외에 두툼한 후드 점퍼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평소 교복 위에 걸치던 회색 후드 점퍼를 오늘 아침에도 주섬주섬 챙겨 입는 아이를 본 순간 혈압이 오르는 느낌이었다는 것.
덥다고 벗고 가라고 몇 번 얘기를 했지만 아이는 들으려 하지 않았고, 챙겨 가라고 했던 작은 가방은 필요 없다며 교통카드와 신용카드 두 장을 휴대폰 케이스에 쑤셔 넣으며 집 밖을 나서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출근을 하는데 출근길에 아까의 일이 생각나서 몇 번씩 화가 솟구치는 느낌이었다고.
아이의 행동, 엄마의 반응, 그 어떤 것도 낯설지 않았다. 나도 늘 겪는 일이고 감정이기 때문에 그 답답함에 깊이 공감했다. 그러나 이내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하는 회의적인 물음에 도달했다.
”그런데.. 우리 왜 아직도 이러지? “
“왜 이렇게 애 키우기는 힘든 거야?”
어쩌면, 아직도 아이를 ‘키운다’ 생각하니 힘든 건 아닐까?
사춘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자는 대로 얼추 따라오는 시늉이라도 했던 아이들이, 언젠가부터 자기주장을 세우고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을 때, 그 당혹스러움을 쿨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엄마가 사다준 옷을 아무런 불평 없이 입고, 엄마가 선택한 학원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면서도 학원에서 ‘멍 때리'는 정도로만 부당함을 표현하는 게 고작인 아이들, 엄마가 골라준 음식을 먹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엄마가 골라줘야 했던 아이들이었다.
그랬던 아이들이 어느 날인가부터 엄마가 골라준 음식과 옷을 거부하고, 엄마 기준을 벗어난 친구를 사귀고, 엄마 때문에 공부가 하기 싫어졌다고 한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면 이 더운 날 두꺼운 점퍼를 무겁게 들고 다닐 일이 없을 테고, 자꾸만 벌어지는 휴대폰 케이스 때문에 종일 신경 쓸 일도 없을 터였지만, 아이는 이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다 한다.
하나 건너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해서 주도적으로 살아가려는 아이의 모습이 바람직한 성장의 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겠건만, 엄마란 타이틀을 가진 우리는 아이의 이런 갑작스러운 성장이 달갑지가 않은 것인지. 보다 편리하고 좋은 방법이 있는데 고작 자기 주도적으로 한다는 행동들이 아둔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비칠 뿐이다.
집안에서 식물을 키울 때, 햇볕이 부족한 거 같으면 볕이 잘 드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주고 흙이 바짝 말라 있으면 한 번씩 물을 준다. 종류에 따라 키우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볕과 물, 그리고 바람만 잘 통하게 해 주면 웬만한 식물은 기르는 이의 큰 수고 없이 잘 자란다. 그러나 화분 속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은 볕을 향해 잎의 성장 방향을 돌리는 것 외에는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잘못되는 일도 없다. 야생의 식물처럼 홍수나 산사태 등으로 뿌리째 뽑히거나 가뭄에 말라죽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아이를 집안의 식물처럼 키우고 싶다는 얘기인가?
아이가 내 의견과 부딪힐 때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언제 해달라고 했어?”
“그건 엄마가 원해서 한 거잖아.”
“엄마가 다 해줘서 난 당연히 할 줄 모르지.”
큰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잘 정비된 길을 순탄하게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 아이가 경험할 기회를 빼앗았고, 실패 없이 모든 걸 쉽게 얻은 아이는 ‘제대로 실패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평생 실패 없이 살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이 상태로 나이 들어 큰 실패를 마주했을 때 아이가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목이 말라 물을 찾아 나서기 전에 ’ 목마르지 ‘하며 물을 대령했고, 배고프기 전에 먹을 것이 주어졌으니, 수동적인 삶이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일 텐데, 주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 아이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거 같아 '이건 아니지’ 싶은 생각에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사춘기를 구실 삼아 부러 반항을 하는 건지, 아니면 이제야 묵은 불만을 표출할 용기가 생긴 것인지. 분명한 건 이 아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 자율‘이라며, 제발 알아서 할 수 있도록 ‘신경 좀 꺼달라’ 며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방식이 틀릴 수도 있고 때론 바보 같아 보이더라고 그냥 봐주면 안 되겠냐고. 그렇게 명령하니 더 하기 싫어지고, 그런 식으로 통제하니 더 하고 싶어 진다고…….
그냥 자라게 둬 볼까
”어렵다”, “봐주기 힘들다”,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 “ 2차 성징이 한창인 아이들을 둔 엄마들이 모이면 하나 같이 하는 말들이지만, 사춘기는 꼭 필요한 시기가 아니던가. 아동기를 벗어나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통과의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엄마들이 이 시기를 두려워한다.
아이를 키우는 ‘노동 육아’에서 벗어나 아이의 자람을 지켜보는 시기이자 엄마의 삶을 되돌아볼 여유가 생기는 시간이기도 할 텐데, 그 사색의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의 ‘꼴‘을 견뎌내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믿고 싶다. 우리가 특별히 어떤 식으로 애쓰지 않아도, 아이는 자신의 타고난 모양대로 잘 성장하고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 한번 믿고 지켜보자고. 집안의 화분에 갇혀 평생을 살아갈 식물이 아닌 이상, 아이는 바깥세상의 풍파를 스스로 견뎌가며 느끼고 깨달으며 단단해져야 할 것이다.
10년 이상 집안의 화초처럼 자란 아이들을 대자연속에 적응시키려면 이제부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시간과 노력 또한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다. 엄마는 그저 그 꼴을 견디면 되는 것이다.